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서쪽 영로 --- 61. 오색령 (五色嶺) --- 92. 필여령 (弼如嶺) --- 313. 단목령 (檀木嶺) --- 514. 소동라령 (所冬羅嶺) --- 655. 조침령 (鳥寢嶺) --- 836. 구룡령 (九龍嶺)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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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서쪽 영로에 들어가면서과거 양양부(襄陽府)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통하는 영로는 총 6개가 있었다. 그러나 이글의 성격상 6개 영을 개별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전체를 한 번에 이해하는자 료로서는 부족할 것으로 생각하여 설명을 부가한다.우선 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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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Ⅱ. 오색령과 한계령의 관계Ⅲ. 일제강점기 오색령Ⅳ. 양양 오색령 지명복원Ⅴ. 맺는말오색령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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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령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 1-30번지이며, 해발 1,004m로 예전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영로였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 (1596) 2월 1일에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적병이 영동으로 침입하면 이 영(嶺)을 넘을 것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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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악산과 한계산2. 소솔령과 오색령(한계령)3. 소솔령이 오색령인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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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雪嶽山)은 강원도 양양군, 인제군, 속초시, 고성군에 걸쳐있는 산으로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청봉(1,708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향로봉과 금강산을, 남쪽으로는 점봉산과 오대산을 두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과 지리산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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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계령의 옛 지명은 소솔령(所率嶺)이었다.〈그림 3〉『팔곡집』권2 (한계산)1589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八谷 具思孟, 1531~1604년)의 『팔곡집 (八谷集)』에 수록되어 있는「한계산(寒溪山)」시(詩)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옛 절 한 계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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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권 72(宣祖實錄 卷七十二) 1596년 2월 1일에 비변사(備邊司)가 선조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적병이 경상도 영해(寧海) 연해를 따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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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의 오색령에 대한 표현2. 해방 이후 오색령(한계령)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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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도 행정 내적으로는 오색령이란 지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보」제140호(1913. 1. 21)에 “강원도의 3등 도로를 다음과 같이 정하다. 양양~인제 간(藥水里, 五色嶺, 魚頭里 經由)”이라고 고시 하면서 오색령(五色嶺)을 공식 지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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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인마(人馬)만 다니던 오색령이 일제 말기에야 우마차가 겨우 갈 수 있는 도로였다. 반면에 백두대간 중 최고 낮은 529m의 진부령(陳富嶺)이 1938년 『조선도로 령』에 의거하여 65호선 국도가 되면서 영북지역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단선 국도로서 역할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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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를 전후하여 소동라령(所冬羅嶺)이 도로의 기능을 상실하자, 오색령은 새로 개척한 영로로 분명히 소동라령과는 별개의 지명이다. 여지도(輿地圖, 1736∼1767) 등에는 오색령과 소동라령은 전혀 다른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그림 13〉고대로(古大路)가 표기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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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에 양양군지(襄陽郡誌)를 발간하기 위해 군지발간위원회에서 각종 영로 (嶺路)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조선 침탈의 목적으로 작전지도를 제작할 때 오색령을 한계령으로 뒤바꿔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역사적으로 영(嶺)의 기능은 귀향보다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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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Ⅱ. 필여령에 관한 고찰Ⅲ. 필여령의 유래와 변화Ⅳ. 필여령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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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여령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와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를 잇는 영로(嶺路)이다. 양양군 서면 오색리 44번 국도 오색령 정상 근처인 필례령 입구에서 접속하는 왕복 2차로이다.필여령(弼如嶺) 북쪽에는 소솔령(所率嶺)이 있었는데 소솔령은 오색령(五色嶺)의 옛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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