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 이후 오색령(한계령)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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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인마(人馬)만 다니던 오색령이 일제 말기에야 우마차가 겨우 갈 수 있는 도로였다. 반면에 백두대간 중 최고 낮은 529m의 진부령(陳富嶺)이 1938년 『조선도로 령』에 의거하여 65호선 국도가 되면서 영북지역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단선 국도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가. 국군에 의한 오색령(한계령) 전술도로 공사
6. 25 이후에도 이러한 현상은 지속되다가 인제군 북면 한계 삼거리에서 양양군 서면 오색리를 잇는 전술도로(戰術道路)의 필요성에 의거하여 육군 제3군단 1102 야전 공병단 (제7971부대) 제125 공병대대가 1966년 4월 1일에 착공하여 1971년 11월 30일 2차선 비포장도로를 완공하고 같은 해 12월 27일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 완공을 앞두고 1971년 8월 31일 『일반국도노선지정령』에 의해 국도 제44호선 양평~양양선으로 137.2㎞가 지정되었다.
영의 정상에서 오색리 방향으로 400m를 내려오면 동해안 쪽으로 갓길에 “공병 125 대대”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당시 수고한 공병대의 기념비이다.
〈그림 10〉오색령 개통식 현장에서 테이프를 커팅하는 모습
〈그림 11〉제125 야전공병대대 개척자 기념비와 오색령 전술도로공사 희생자 위령비
공사 당시 외설악 방향에서는 1중대장 ‘정하기’ 대위가, 내설악 방향에서는 2중대장 ‘반웅식’ 대위가 지휘하여 정상을 향하여 공사를 진행하다가 기념비 위치인 이곳에서 만났다 한다.
그 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開拓(개척)의 完結點(완결점) 개척정신은 / 깊고 험한 설악에 도전하여 / 동서를 잇는 데 / 승리하였노라 / 육개 성상의 대역사는 / 오늘 여기서 완결되나니 / 자연의 신비를 여기에 / 우리의 개척정신을 / 영원히 기념하노라 / 최후의 연결점에서 /
1971. 11. 30. 제125 야전공병대대 개척자들
영을 지나는 탐방객의 휴식공간인 설악루(雪嶽樓)는 한계령 휴게소 위쪽 대청봉을 향하는 길옆에 1971년 개통식에 맞추어 준공하였으며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라 한다. 그 후 1972년 2월에는 도로를 개설하다 숨진 장병 7위에 대한 위령비(慰靈碑)를 정자 뒤편에 세우고 정자로 오르는 길을 108계단으로 고쳐서 추모의 정을 더하였다. 위령비(慰靈碑)에 있는 고인의 명단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 본다.
■ 위령비 고인 명단
소위 김춘부, 소위 백상호, 중사 이병훈, 병장 장완익, 병장 최영해, 일병 이운희, 일병 조경철,
오색령(한계령) 정상 920m에는 검은색 외관으로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한계령휴게소” 가 세워져 있는데 통행인 대부분은 차를 멈추고 동해쪽을 바라보며 오색의 장관에 빠지 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김수근씨가 설계하였는데 1979년에 시작 하여 1982년에 준공하였다. 이 건물은 한국건축가협회에 의해 ‘거대한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 속에 부드럽게 안겨 있는 실용적 건물’로 평가되어 올해의 건축 대상을 수상하였다 한다.
나. 오색령(한계령) 확·포장공사
1979년 9월에는 총 경비 1백65억원의 금액으로 오색령 확·포장공사를 민간 기업이 착공하여 도로 폭을 기존의 6m에서 9m로 넓히고 73.5㎞를 포장함으로써 서울에서 양 양 간 운행 시간을 종전 5시간 30분에서 4시간 30분으로 단축하여 오색은 물론 설악권 의 관광 수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3년여의 공사 끝에 1981년 8월 19일 준공식에는 남덕우(南悳祐, 1924년 4월 22일 ~2013년 5월 18일) 국무총리와 강릉 출신 김주남(金周南, 1931년 4월 8일~2009년 5 월 21일) 건설부장관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다. 오색령(한계령) 집중호우 복구공사
2006년 7월 15일과 16일에는 태풍 에위니아(EWINIAR)가 몰고 온 막대한 수증기가 태백산맥에 가로막혀 거대한 호우 구름을 형성했으며 2시간 동안 시간당 최대 50∼100 ㎜에 달하는 게릴라성 폭우가 되어 강원권과 중부권을 강타했다. 호우 피해가 집중된 설 악산 남부 일대인 원통∼한계령∼양양으로 이어지는 44번 국도의 한계리와 오색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특히 한계령을 관통하는 44번 국도는 곳곳에 도로와 다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엿 가락처럼 휘어진 가드레일이 수백 미터로 이어졌으며 100톤이 넘는 바위들이 망가진 도 로 위에 내려앉았다. 동서에 걸친 한계령길 25㎞ 중 100여 곳 이상에서 산사태가 발생 하거나 도로가 유실되는 큰 피해를 남겼다.
그 후 총 1,287억원을 투입한 결과 유실 도로 76곳을 복원했으며 산사태와 집중호우 로 붕괴된 비탈면 3,145개소와 교량 35개소, 배수관 130개, 암거 56개 등을 설치하여 복구공사를 완료하고 2008년 1월 8일 오전 11시 한계령 휴게소에서 ‘수해복구 준공기 념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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