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양양 오색령 지명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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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를 전후하여 소동라령(所冬羅嶺)이 도로의 기능을 상실하자, 오색령은 새로 개척한 영로로 분명히 소동라령과는 별개의 지명이다. 여지도(輿地圖, 1736∼1767) 등에는 오색령과 소동라령은 전혀 다른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
〈그림 13〉고대로(古大路)가 표기된 오색령과 한계령이 표기되어있는 동여도
북쪽의 오색령은 설악산의 주봉에 가장 가까이 있으며 소동라령은 오히려 구룡령에 인접하고 있어 두 영(嶺)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설악산의 주봉에 근접한 오색령의 위치로 볼 때 지도상의 오색령은 현재의 한계령임이 분명하다.
〈그림 14〉일제강점기 1/50000 지형도와 인제군세일반 관내도
오색령에 대해 조선시대에는 확고한 문헌상 출처가 확보되어 재론의 여지가 없었으나, 1915년경 일제가 한반도 침탈을 목적으로 만든 1/50,000의 지도에 오색령 대신한 계령을 오기(誤記)한 것을 광복 이후에도 고치지 않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발행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양양군 주관으로 오색령 도로를 2등 도로로 만들기 위해 영서 4개 군(춘천, 홍천, 양구, 인제)의 협조하에 강원도청에 군(郡)별로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영동의 강릉, 삼척, 울진군에서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강원도로부터 도로 개착 승낙을 받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2등 도로로 의 승격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내의 7개 군이 양양을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당시 오색령이 2등 도로가 되어 영이 열리면 인접한 군들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홍천군의 진정서에는 “본 지방은 대 시장인 원주의 중계지가 되어 양쪽의 물자는 홍천을 경유케 되는데 속된 말로 홍천은 양양 물화의 전시장이라 한다. (중략) 일선(一線)은 오색령을 넘어야 인제군을 통과하는 바, 지금은 차량이 통과하지 못하는 까닭이지만 만일 차량이 통과된다면 통상(通商)이 활기차게 번창할 것이 극명하다.”고 오색령 개통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 당시 모든 도민은 “오색령”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인제군민 800명도 진정서에 오색 령을 분명하게 명기하여 2등 도로로 개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소동라령과 오색령은 별개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과 일제강점기에 오색령 명칭이 한계 령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명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하여 역사적으로 고증된 자료를 토대로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아서 후손들에 물려주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44호선 국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국도 노선 내에 포함되어 있는 오색령은 한계령이 공 식 명칭이 되면서 모든 교통 표지판이 한계령으로 표기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남설악을 중심으로 양양군민의 41년 숙원인 “오색케이블카”가 2026년부터 상업 운전에 들어가면 “오색”이란 지명과 함께 “오색령”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옛 영광을 되찾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15〉오색령 삭도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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