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Ⅴ. 맺는말

    페이지 정보

    조회 31회

    본문

    지난  2010년에  양양군지(襄陽郡誌)를  발간하기  위해  군지발간위원회에서  각종  영로 (嶺路)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조선 침탈의 목적으로 작전지도를 제작할 때 오색령을 한계령으로 뒤바꿔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영(嶺)의  기능은  귀향보다는  상경(上京)하는  데에  더욱  큰  의미를  두었다. 따라서 당시의 인제현과 양양부의 관점에서 볼 때, 인제현에 속한 한계리는 귀향의 의미 이고, 양양부에 속한 오색리는 상경의 의미로 영의 기능과 관련된 상경의 출발지는 오색리라고 할 수 있다고 오색령 관련 심포지엄 때 강릉원주대 김무림 교수가 밝혔다.

    오색령이 한계령으로 뒤바뀐 것은 일제의 잘못으로 인제군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알지만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이미 10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한계령이다’

    일제강점기에  오색령  도로가  3등  도로로  발표가  되자  2등  도로로  승급하여  개착하기 위한 양양군의 노력을 보았다.

    당시  영서의  4개  군(춘천, 홍천, 양구, 인제)에서도  오색령  도로의  개착이  자기  군의 물산(物産) 이동에  크게  도움이  되며  특히  동해안의  싱싱한  해산물  유입을  위하여  강원 도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끝내 2등 도로로의 승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색령이 제자리를 찾기를 위해 지난 2010년에 양양군 주관으로 오색령 관련 학술 심 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는 양양문화원 관계자와 국토정보지 리원을 방문하여 자료수집과 한계령 지명에 대한 부당성을 호소한 바 있으며 지난 2012 년에는 사무국장과  향토사연구원들이  옛  소동라령  도로를  현지  답사하여, 조선  성종  때 역로(驛路)가 폐쇄되어 미시령으로 옮겨 간 후 600여 년이 되어 감에도, 영로에는 당시에  개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의  형체와  영(嶺) 정상에는  인위적으로  쌓은  이정표인 돌무지가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소동라령의 확실한 위치가 지금의 북암령과 일치함을 발표하였다. 이때 오색역은 원암역으로 이전하였음도 확인하였다.

    소동라령은  지금의  북암령(北庵嶺)으로  오색령(한계령)에서  남쪽  방향으로  10㎞이상 떨어져 있으며 소동라령은 인제현(인제읍)으로 향하는 영이 아니고 춘천부 기린현(기린면 진동리)으로 향하는 영이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법(2007년 제정)에 의해 설립된 『한국고전번역원』이 『세종실록지리지』 양양도호부편에서 ‘소등라령(所等羅領)’을 ‘바드라재’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소동라령(현 북암령)이 바드라재라는 것이지 오색령(한계령)이 바드라재로 번역된 것이 아님을 다시한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