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강점기의 오색령에 대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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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도 행정 내적으로는 오색령이란 지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보」제140호(1913. 1. 21)에 “강원도의 3등 도로를 다음과 같이 정하다. 양양~인제 간(藥水里, 五色嶺, 魚頭里 經由)”이라고 고시 하면서 오색령(五色嶺)을 공식 지명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림 6〉조선총독부강원도고시 제1호 관보
가. 오색령 2등 도로 개착을 위한 노력의 개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 1922. 12. 6.)에 의하면 양양군에서는 오색령 도로를 2등 도로를 만들기 위해 “오색령 통과 기성동맹규약(五色嶺 通過 期成同盟 規約)”을 만들어 3개년에 걸쳐 완성하기 위하여 총공사비 중 15만원을 기부하는 조건으 로 목표를 세우고 규약을 만들었다.
이 규약에 따라 1922년 12월 6일부터 양양 오색령로를 2등 도로로 개착(開鑿: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냄)해야 한다는 진정서(陳情書)를 영서에서는 춘천을 시작으로 홍천, 인제, 양구가 연쇄적으로 강원도에 제출하였고, 영동에서도 강릉, 삼척, 울진 등이 오색령 도로 개착(開鑿)을 찬성한다고 한목소리를 내었다.
당시 강원도로부터 오색령 도로 직로(直路)를 위한 답사 하명(下命)이 있자 1931년 11 월 8일 양양군수 박재수(朴在洙)는 군내 관민유지(官民有志) 45명을 대동하고 조침령(鳥砧嶺)을 통해 인제군 현리를 경유(經由)하여 인제군청을 방문 인제군수 김극일(金極一)과 원만한 협정을 마친 후 오색령 도로를 시찰하고 11월 14일 귀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32년 3월 15일에는 인제군 북면 주민 800여 명이 연서로 날인하여 인제읍에서 기린을 거쳐 양양으로 관통하는 도로는 불가하니, 인제군 북면 원통리를 중심으로 오색령 (五色嶺)을 관통케 해달라고 인제군청과 강원도에 진정서를 제기하였다고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2등 도로로 고시된 경성(京城)∼오리진선(五里津線)이 경성(京城)∼간성선(杆城 線)으로 변경된 후 우리군과 주변 7개 군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오색령 직통노선은 이루 어지지 않았고 1938년 12월 1일「조선도로령」에 의해 춘천∼간성선이 65번 국도가 되면서 양양∼인제 간은 국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자 ‘양양 4개면(양양, 서, 손양, 강현)은 연합으로 오색령 도로를 수선(修繕)하여 탐승객(探勝客)의 불편을 조금도 없게 할 예정’ 이라는 기사가 매일신보(1938. 12. 6.)에 전해온다. 결국 양양군민의 16년간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부역(負役)을 통해서 자력으로 당장 도로 수선을 하겠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나. 오색령 통과 기성동맹 조직
1922년 12월 6일 양양군민은 모든 면의 대표가 참여하여 “양양 오색령 통행 기성동맹 규약”을 만들고 회원 50명이 참여하는“오색령 이등도로 개착 기성동맹회”를 조직하였다. 오색령이 2등 도로로 승격하면 매년 5만원씩 3개년간 총 15만원을 공사비로 기부하는 조건으로 당국에 청원한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 襄陽 五色嶺 通過 期成同盟規約(양양 오색령 통과 기성동맹규약 1922. 12. 6)
旣報와 如히 襄陽郡에서 組織된 五色嶺 二等道路 開鑿 期成同盟會規約은 左와 如하더라
第1條 本會는 襄陽郡 興亡問題인 襄陽麟蹄間 五色嶺 二等道路 開通에 對하야
左記 方法에 依하야 向三個年 間을 期하야 完成하기로써 目的함.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양양군에서 조직된 오색령 2등 도로 개착을 위한 기성동맹회 규약은 좌측의 표기와 같다.
제1조 본회는 양양군 흥망의 문제인 양양∼인제 간 오색령 2등 도로 개통에 대하여 좌 측에 기록된 방법에 따라 향후 3개년간에 완성하기로 목적을 하였다.
(1) 本會는 每年五萬圓式 三個年間에 合計 十五萬圓을 工事費에 寄附의 조건으로써 至 急하야 此기 決行方을 當局에 請願할 事.
(2) 急速決行請願하기 爲하야 陳情委員을 派遣할 事.
(3) 陳情委員은 當局의 決定을 經함에 至하기까지 間斷없이 郡望의 完建을 力行하기로 함.
(4) 本會員인 郡民은 目的을 達키 爲하야 空費를 節하고 夙夜生業에 厲精하되 殊히 閑散時는 副業을 與하야 自己의 負擔한 曾費로 以上會員의 經濟力을 發達케 할 事.副業을 與하야 自己의 負擔한 曾費로 以上會員의 經濟力을 發達케 할 事...... 이하 생략
(1) 본회는 매우 급박하여 매년 5만원씩 3개년간 총 15만원을 공사비로 기부하는 조건을 이번에 결행한 방법으로 당국에 청원한다.
(2) 급속히 결행하고 청원하기 위하여 진정 위원을 파견한다.
(3) 진정 위원은 당국의 결정이 목적에 이르기까지 중단없이 군민의 바람대로 건설이 완료되도록 전력을 다해 행한다.
(4) 본 회원인 군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고 밤낮으로 생성으로 매진하되 특히, 한가할 때는 부업을 하여 자기가 부담한 회비가 회원의 평균 이상 금액이 되어 경제력을 발달케 한다. ..... 이하 생략
다. 2등도로 개착을 위한 노력
■ 明年度 豫算에 編入을 企待 襄陽郡民의 渴望하든 五色嶺道路 踏査 道에서 實地로 踏査키를 通達(명년도 예산에 편입을 기대 양양군민이 갈망하든 오색령도로 답사 도에서 실지로 답사키로 통달 1931. 11. 21)
[襄陽] 襄陽郡民으로 하야금 十有 餘年으로두고 熱望하던 西路 開鑿 問題는 지금으로 부터 襄陽麟蹄 兩郡社會에 好 消息을 傳하게 되었다. 本 道 當局으로부터 該 直路 踏査 의 下命이 있음으로 襄陽郡守 朴在洙 氏는 지난 十一月 八日 淸水道技手와 當地官民有志 四五名을 帶同하고 西路인 鳥砧嶺을 越去하야 麟蹄郡 縣里를 經由하고 그곳서 麟蹄郡 庶 務主任을 相逢하야 모든 山水와 道路狀況을 聽取하고 同郡廳 所在地까지 踏査하고 該 郡 郡守 金極一氏와 圓滿한 協定을 마친 후 五色嶺 道路 鬱密한 良材良木을 視察하고 同 十 四日 歸廳하였다. 郡民一般은 明年度 道豫算中에 編入해 주기를 渴望하는 중이다.
양양군민이 10여 년을 열망하던 서쪽 도로 개착 문제는 지금 양양과 인제 양군 사회 에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강원도에서 오색령 직로 답사의 하명이 있어 양양군수 박재수씨는 지난 11월 8일 시스미(淸水) 도청 기원과 양양군 관민유지 45명을 대동하고 서쪽 영로인 조침령을 넘어 인제군 현리를 경유하여 그곳에서 인제군 서무 주임을 만나 산수와 도로 상황을 청취하고 인제군청 소재지까지 가서 인제군수 김극일씨와 원만한 협 정을 마친 후 오색령 도로의 울창하고 빽빽한 좋은 목재를 시찰하고 14일에 귀청하였다. 군민 모두는 내년도 강원도 예산에 편입해 주기를 갈망하는 중이다.
■ 麟襄線 道路 問題로 洞民 當局에 陳情 五 色嶺으로 고쳐달라고 800名 洞民 連署로 (인·양선도로 문제로 동민 당국에 진정 오 색령으로 고쳐 달라고 800명 동민 연서로, 동아일보 1932. 3. 15)
강원도 인제 양양 간 도로는 총경비 20만원의 예산으로 벌써 설계해 놓고 아직까지 공사를 착 수하지 아니하였던바 금년도 인제지방은 대흉작 으로 말미암아 수만 이재민이 아사선상에서 헤 매는 현상이므로 군 당국에서는 각 면에 구제회 를 조직하고 각 방면으로 맹렬히 활동함은 물론 이거니와 궁민(窮民) 구제책으로 인제 양양 간 도로공사에 착수하기를 도에 신청하여 불원간 (不遠間) 착수하게 되었다는데 현재 설계한 것은 인제읍에서 기린을 거쳐 양양으로 관통하게 되었다 한다.
8백여 명은 연서 날인하여 전기(전에 설계된 기린 노선)의 예산은 불가하니 인제군 북 면 원통리를 중심으로 오색령(五色嶺)을 관통케 해달라고 군 당국과 도 당국에 진정서를 제기하였다.
〈그림 8〉1932년 3월 15일 기사
■ 四個面 聯合으로 五色嶺 道路 修繕 探勝客에 便宜不少(4개면 연합으로 오색령도로 수선 탐승객에 편의 불소 1938. 12. 6)
[襄陽] 五臺山 落脈인 襄陽郡 西岳山 一帶에는 無盡藏의 森林 藥草와 古蹟이 있고 襄 陽邑에서 西面을 經由하야 約 四里를 入山하면 五色里가 있어 西便山壁에 五色藥水가 있 어서 每年 春夏期에는 數千의 患者와 探勝客이 集散하게되나 道路가 不完全하야 車馬通 行이 不能함으로 此를 遺憾으로 生覺하는 地方民 等은 今月 上旬부터 工事를 着手할 豫 定이라는데 隣面인 巽陽, 降峴 兩面에서도 多小夫役의 補助가 있을 模樣이라고 한다.
오대산 낙맥인 양양군 서쪽의 설악 산 일대는 무진장의 산림과 약초, 고 적이 있다. 양양읍에서 서면을 경유 하여 약 4리를 입산하면 오색리가 있고 서쪽 편 산 벽에 오색약수가 있 어 매년 봄과 여름에 수천의 환자와 탐승객이 방문하게 되나 도로가 불완 전하여 차마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던 지방민 등은 금월 상순부터 공사를 착수할 예정이 라는데 인근 인 손양면, 강현면에서 도 다소의 부역 보조가 있을 모양이 라고 한다.
〈그림 9〉1938년 12월 6일 매일신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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