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서쪽 영로(嶺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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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서쪽 영로에 들어가면서
과거 양양부(襄陽府)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통하는 영로는 총 6개가 있었다. 그러나 이글의 성격상 6개 영을 개별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전체를 한 번에 이해하는자 료로서는 부족할 것으로 생각하여 설명을 부가한다.
우선 영의 순서를 오색령에서 구룡령까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순서대로 정리하였으며 양양부에서 출발하면 인근 고을 어느 곳에 이르는지를 확인하여 정리하였다.
인제현으로 가는 영로는 오색령(五色嶺)과 필례령(必曳嶺)이 있고, 연수파(連水坡)와 조침령(鳥寢嶺),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춘천부 기린현으로 가고, 구룡령(九龍嶺)은 강릉부로 가는 영로였다.
여기에서 인제현은 지금의 인제군청 방향을 말하며, 춘천부 기린현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가 되었고, 구룡령 넘어 강릉부는 홍천군 내면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최근 오색령(한계령)을 두고 인제군에서 소동라령과 같은 영이었다고 잘못 해석함으로써 산악인들에 의해서 인터넷상에 마치 정설처럼 여겨 잘못된 내용을 퍼 나르고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어 이를 바로 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양양부에서 서쪽으로 통하는 영로(嶺路)는 6개였지만 이 중에서 사람과 물자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역을 매개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한 역로(驛路)는 소동라령이었다. 오색역(五色驛)이란 이름 때문에 오색령이 역로로 활용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색 령의 돌산을 뚫고 우마차가 통과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이후부터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제45 간성군 산천(山川)조에 ‘미시파령(지금의 미시령)은 고을 서남쪽 80리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1493년(성종 24)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역원(驛院)조에는 ‘원암역(元岩驛) 옛터가 있는데, 고을 서남쪽 63리에 있었다. 미시파령(彌時坡嶺)의 길이 열리면서 오색역(五色驛)을 철거하여 여기로 옮겼다.’는 기록 이 있다.
결국 1493년에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역로(驛路)로서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미시파령(彌時坡嶺)이 열렸고, 소동라령의 역로(驛路)를 유지 보수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오색역(五 色驛)도 폐지되어 새로운 역로를 따라 간성지역으로 옮겨갔으며 원암역(元岩驛)에서 이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인제에서 주장하는 오색령이 소동라령이라는 억지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오류임을 확실하게 밝혀두는 바이니 바르게 이해하기 바란다.
6개의 큰 영들이 지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縱走)하는 대간(大幹)길로 이용되며 총 35구간 중 31구간은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24㎞이고, 32구간은 조침령에서 오색령(한계령)까지 25㎞이다. 총 42구간으로 나누면 각각 37구간과 38구간으로 구분하기 도 한다.
특히, 조침령과 구룡령에서는 자전거 힐클라이밍 경기가 종종 개최되어서 과거와는 다른 기능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6개의 큰 영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영을 넘어야 하는데 작은 영으로는 향현(香峴/향 째:상평고개), 소량치(所良峙:서늘재), 한령(寒嶺:빨딱고개), 형제현(兄弟峴), 망령(望嶺)고 개, 작은양아치(小兩峨峙), 큰양아치(大兩峨峙) 고개가 있다.
이글에서 작은 영로는 위치만 확인하였을 뿐, 따로 큰 영들처럼 정리하지는 않았어도 필요에 따라 부가적인 설명을 하였기에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줄로 안다.
큰 영로의 대부분은 확·포장되어 국도와 지방도로 이용이 되면서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단목령(연수파)과 북암령(소동라령)은 아직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조침령과 구룡령은 옛길은 남아있으나 새로운 2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추억 속의 영로가 되었다. 이중 단목령(연수파)은 1982년 『설악산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 되면서 1987년부터 입산이 통제되었으며, 2011년 《양양향토사연구소》에서 탐방 조사한 바에 의하면은 북암령(소동라령)은 역로 의 기능을 잃은 후부터 지금까지 거의 폐쇄상태 이기에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영로도 소량치(서늘재)와 망령고개, 형제현을 빼고는 모두 포장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로 모두는 별개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웃 고을과 서로 유기적인 관계의 시발(始發)로 양양부의 물자와 사람이 영서로 통행하면서 물물교환 내지는 상행위를 추진하였으며, 특히 소금과 해물이 주로 인제로 갔지만 멀리는 홍천, 원주, 양구, 춘천까지도 이어지는 것을 “오색령 2등 도로 개착 진정서”에서 확인하였다.
6개의 영로는 비슷하면서도 개별적인 특징과 사람 살아가는 맛과 멋이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 영을 읽어가면서 이들의 미묘한 차이와 우리《양양학연구소》에서 전하려 한 것 이 무엇인지를 느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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