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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3. 소솔령이 오색령인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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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권 72(宣祖實錄  卷七十二) 1596년  2월  1일에  비변사(備邊司)가  선조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적병이 경상도 영해(寧海) 연해를 따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적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면 적병이 깊숙이 영동(嶺東)으로 침입하여 추지령(楸池嶺)·미수파(彌水坡:미시령)·오색령(五色嶺)·백봉령(白鳳嶺)등을 차지하고 모두가 영로(嶺路)를 넘게 될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토록 많은 문헌에서 언급되던 소솔령(所率嶺)이라는 고개명은 이때부터 모든 기록과 지도에서 사라지고 오색령(五色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비슷한 명칭의 고개 이름(소파령, 소솔령, 소어령, 소동라령 등)에서 벗어난 특별한 지명을 통해 위치를 쉽게 기억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김수증(金壽增)의 『곡운집(谷雲集)』에  수록된 『한계산기(寒溪山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691년 5월 9일의 기문(記文)에 “한계사(寒溪寺) 옛터를 지나니 북쪽사면의 모든 산봉우리는 곧게 솟아 있고, 나무들이 무성하여(중략) 물가의 돌 위에서 점심을 들 었다. 지나는 스님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오색령(五色嶺)을 지나서 양양(襄陽)으로  가는  길인데  대개  이곳에서  바닷가까지의  거리는  80리  정도라고  하였 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양양에서 영을 넘어 한계사 터를 지나 인제로 가는 영이 소솔령임을 기 록을 통해 확인했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스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오색령을 거쳐 양양으로 간다고 대답했다. 이로써 소솔령이 오색령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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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5〉한계사지 전경



    양와 이세구(養窩 李世龜)의 문집인 『양와집(養窩集)』에 1691년 10월 3일 기록한「동유록(東遊錄)」이  있는데 “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고  그  동쪽은  양양(襄陽)이고  서쪽은 인제(獜蹄)이며 오색령 북쪽이 미시파령이다.”라고 적고 있다.

    식산 이만부(息山 李滿敷)의 『식산집(息山集)』 「금강산총기」서두에 “대체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으며  백두산(白頭山)의  낙맥(落脈)이  남으로  흘러  철령에  이르 며  남북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동으로  굽이치면  추지령·쇄령·온정령  등  세  개의 큰 영(嶺)으로 팔백리를 왕래하며, 온정령 남쪽 삼십리에 금강산이 있다.

    금강산에서  동해를  따라  백리를  내려가면  진보령〔진부령〕이다. 진보령에서  오십리를 더 가면 석파령이고, 그곳에서 삼십리를 더 가면 미치령〔미시령〕, 다시 육십리를 가면 한 계산이고, 다시 삼십리를 가면 오색령에 이르며, 이곳에서 구십리를 가면 오대산에 이른 다. 여기서 다시 삼십리를 가면 대관령이고, 사십리를 더 가면 백복령이고, 백리를 더 가 면  태백산과  황지  연못이다. 이  영들은  대체로  위든  아래든  지세나  풍경이  빼어나지만 좁고 험준한 모습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이 앞에서 본 고지도들에서도 소솔령과 오색령이 함께 표기된 지도는 없 다. 모든 고지도에서 소솔령이 사라지고 오색령이 나타나고 있다. 한계사에 투숙객이 많 아  이를  감내할  수  없어  절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던  소솔령이란  지명이 모든 지도에서 사라지면서, 필여령의 북쪽 영으로 모든 지도와 문헌에서 빠지지 않고 나 타나는 오색령이 과거의 소솔령임이 분명하다. 오색령은 소동라령이 없어진 후 당시에도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영로로 지금의 한계령(옛 오색령)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