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이름난 산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유독 금강산이 으뜸이다. 중국 사람들도 심지어 고려(高麗)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외국 사람도 금강산의 이름을 듣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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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동(關東)의 봉래산(蓬萊山) 사람이다. 스스로 금원(錦園)이라 호를 하였는데, 어려서 잔병이 많아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여자가 해야 할 가사나 바느질은 가르치지 않고 글공부를 시켰다. 글 공부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에 대략 통하게 되고 고금의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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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關東蓬萊山人也自號錦園児小善病父母愛憐之不事女工敎以文字日有聞悟未幾年畧通經史 思効古今文章有時乘興題花詠月窃念吾之生也不爲禽獸而爲人幸也不生於薙髮之域而生於吾 東文明之邦幸也不爲男而爲女不幸也不生於富貴而生於寒微不幸也然而天旣賦我以仁知之性 耳目之形獨不可樂山水而廣視聽乎天旣賦我以聰明之才獨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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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금강산(金剛山)을 올라 1만 2천봉 상상대(上上臺)를 두루 보고 동쪽으로 큰 바다 에 임한 뒤에야 천하의 다른 산들이 작다는 것을 알았다.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이나 풍악산(楓嶽山)이라고 불린다. 세상에서는 봉래산(蓬萊山)이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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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登金剛山.縱觀萬二千峯上上臺.東臨大海.然後知天下之山小也.金剛山.一名皆骨.一名 楓嶽.世以爲蓬萊山.非在海中.卽此山.是也.或曰非也.世莫得以辨也山在東海上.盤居 數十百里.以其趾散落於東海之濱.蜿蟺磅礴.去而復旋.合沓迴轉.列而爲峯者.號一萬二 千.皆白石骨立.石間不生草木.往往楓樹生之.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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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高城)의 모든 경내는 산, 바다, 호수, 정자는 물론이고 아주 평범한 바위라고 할지 라도 모두 뜻과 모양이 있다. 새 같은 것, 짐승 모양을 한 것들도 있고, 어떤 것은 날아 갈 듯 하기도하고 달아날 듯 하기도하였다. 남강(南江)은 바다로 흘러들었고 칠성 바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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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岾.內外山界也.夕卜山僧徒持籃輿來替內山僧告辭.仍乞詩.無慮數十輩. 賦詩淸事.應副 作一役事.有爲而爲之.便作苦.自水岾醉過隱身菴.菴中唯有一僧.名日普珠.携之登隱身 臺.出半天臨大海.而九井峯十二瀑布.蜿蜿如鬪龍爭珠.昨夜雨過.落勢尤壯.此內外山第一 壯觀也.域中諸宗師.爲休靜立碑于金剛山.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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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방에 명산이 셋 있는데, 영남의 지리산(智異山)과 관서의 묘향산(妙香山)과 동해 의 금강산(金剛山)이 그것이다 세 산 가운데 금강이 가장 아름답다. 중국 사람들도 조 선국에 태어나 한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이로써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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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東方.有三名山.嶺南之智異.關西之妙香.東海之金剛.三山之中.金剛爲最勝.故中國人. 有願生朝鮮國.一見金剛山之句.是則山之勝致.非但爲吾東之最.在中國亦不多得.可知也. 願一遊歷. 以償平生之願.而未果焉.崇禎戊辰. 以刑部左侍郎.力求補外. 爲江陵府使.正月 視事.公私之務棼.如至四月.稍自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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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오일
아침이 되자, 함께 여행하였던 성정(性淨)은 유점사를 향해 떠났고 우리는 남쪽으로 갔 다. 3리를 가니 남강(南江)이 나왔다. 이 강의 원류는 셋이라 한다.
하나는 비로봉의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구룡추(九龍湫)를 만들고 일출봉, 월출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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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初一日丙午.朝.性淨向榆岾寺.南行三里.有南江.江之源三其一發毗盧東.爲九龍湫. 抱日出月出九井三峯.絰大明菴.過溫井.流二十餘里.興鉢淵川合.所謂世尊百川.其一發歡 喜岾東.歷小人串.過鉢淵寺.流十五六里.與龍湫川合.其一發九井峯西.過雲栖窟外開心 菴.爲十二瀑流十餘里.與榆岾寺川合.所謂城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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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이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기원되어 남으로 조선국 해변 수천 리에 뻗혔다. 그 산의 큰 것은 영안도(永安道)에 있어서는 오도산(五道山)이요, 강원도(江原道)에 있어서 는 금강산(金剛山)이며, 경상도(慶尙道)에 있어서는 지리산(智異山)인데, 수석이 가장 빼 어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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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일에 발연을 떠나 폭포 하류를 건너 소인령(小人嶺)을 올라가는데, 재가 험악하고 준급하여 걸음걸음이 쳐다보고 올라가기만 하니, 소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빈 말이 아 니라는 것을 믿겠다. 나는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어서 바야흐로 첫 번 고개를 올라가니 유점산(榆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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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보니 진견성봉(眞見性峯)이 북쪽에 당해있고 그 봉 뒤에는 비로봉(毗盧峯)이 형세 가 하늘을 고인 듯하여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 배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전에 평지에 서 쳐다본 것은 바로 그 지엽이요, 상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봉우리 서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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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그때에 문적(文籍)이 희귀하여 사람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였는데, 서역의 사적 을 말한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제6의 큰 망언이니, 민채의 황당무계함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여섯 가지 큰 망언이 있고 한 마디도 명교에 보탬 될 것이 없으니, 이 기록은 빼버 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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