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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341.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이동표(李東標) / 한글 번역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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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가 금강산(金剛山)을 올라 1만 2천봉 상상대(上上臺)를 두루 보고 동쪽으로 큰 바다 에 임한 뒤에야 천하의 다른 산들이 작다는 것을 알았다.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이나 풍악산(楓嶽山)이라고 불린다. 세상에서는 봉래산(蓬萊山)이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니, 바로 이 산이 그것이다. 혹자는, '아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분별할 수 없다.'라 고 한다. 산은 동해 가에 있는데 수백 리에 걸쳐 서려 자리를 잡았으니, 동해의 물가에 그 산자락들이 널리 퍼져 있어 꿈틀거리듯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가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합쳐졌다가 빙 돌아나가기도 하여 줄 지어 봉우리가 된 것이 일만 이천 이라 하니 모두 흰 돌이 뼈대로 선 것이다. 돌 사이에 초목은 자라지 않고 이따금 단풍 나무가 자라나 그 흰 돌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바라보면 흰 구름인가 의심하게 된다. 산 속에는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들이 많은데, 중들이 그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 나 믿을 수는 없다.

    진입로는 험하여 막혔는데, 동해 쪽의 길은 더욱 심하다. 옛날에 안문점(雁門岾) 쪽에 길을 내면서 절벽으로 끊어진 곳은 사람들이 나무를 잘라 잔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때때 로 끊어져서 길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길은 가는 사람이 돌 비탈을 따라 혹 노끈을 잡고 무릎으로 기어서 갔다. 그러다 굴러서 깊은 연못에 빠졌다. 그러므로 유람하는 선비 중 에 여기에 이르는 행운을 얻은 사람이 드물었다.

    제일봉인 비로봉(毘盧峰)은, 봉우리 위에는 항상 구름이 있다. 유람하는 사람이 그 꼭대 기에 이를라치면 문득 폭풍이 불고 비가 내려 낮에도 어두워지므로 사람이 두려워하여 감히 오르지 못한다. 올라가면 곧 한양부터 서해까지를 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철관령 (鐵關嶺)으로부터 숙신씨(肅愼氏)의 땅까지 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태백(太白)으로부 터 신라와 백제의 지역까지 볼 수 있다. 동해에서는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곤어와 붕새가 노닐면서 장난치고, 이른바 1만 2천 봉우리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열 지어 (어른을) 모시는 것처럼 사방에 둘러서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비로봉이 북쪽으로 나간 것은 영랑 점(永郎岾)이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서 방광대(放光臺)가 되었으며, 그 아래는 정양사(正 陽寺)이다. 절은 산허리 부근에 있는데, 매우 높고 넓다. 그 앞에는 헐성루(歇惺樓)가 있 고, 또 그 남쪽에 천일대(天逸臺)가 있다. 대는 그리 높지 않으나 그 형세가 빼어나다. 남 북의 빈 곳에 웅거하여 한 가운데서 돌출하였으므로 내금강(內金剛)의 승경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이곳에 이르면 곧 유람하는 것을 그친다.

    내가 지금 임금 재위 16년 경오해에 은혜를 입어 양양(襄陽) 수령이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떠나 죽령(竹嶺)을 넘어 오대산(五臺山)을 구경하고 대관령(大關嶺)에 올랐 으며 경포대(鏡浦臺)도 유람하였다. 관청에 일이 없는 날이면 그곳의 산과 바다 사이에 서 방랑하였다.

    8월 기사일에 병이 조금 낫자,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진사(進士) 유일상(柳日 祥)이 영남으로부터 왔다. 그 사람은 시를 잘 짓고, 나와 친하므로 드디어 동행하였다. 현산(峴山)에서 출발하여 강선역(降仙驛)을 들렀다가 청간정(淸澗亭)에 들어가고 만경대 (萬景臺)에도 올랐다. 저녁에는 간성(杆城)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태수(太守) 정성원(鄭聲 遠)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음날은 대강역(大康驛)에서 유숙하였고 또 그 다음날에는 고성(高城)에 이르렀다.

    양양으로부터 여기까지 바닷길이 모두 2백 여리 인데, 청초호(靑草湖), 영랑호(永郎湖), 광호(廣湖), 소호(蘇湖), 선유담(仙遊潭), 화진호(花津湖), 감호(鑑湖) 등을 지나왔다. 이따 금 모래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울었고 모래밭 가에는 푸른 소나무가 많았다. 바다 가 운데 섬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였고, 혹 석봉이 기궤하기도 했다. 남강(南江)에 아름답게 꾸민 배를 띄워 해산정(海山亭)에 올랐다. 정자의 동쪽은 바다에 닿아있다. 바 다 입구에는 칠성암(七星庵)이 파도 사이에 열 지어 서 있는데 모두 옥색이다. 서쪽으로 금강의 구정봉(九井峰)이 보이는데, 구름 사이에 삐죽 보인다. 세상에서 악양루(岳陽樓) 를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는 것은 백 리 동정호(洞庭湖) 가운데 임금같이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정자는 옆으로 큰 바다와 금강산을 끼고 있다. 물이 크고 또 기이하 니 마땅히 더불어 견줄 것이 없다. 감호, 삼일포(三日浦), 총석(叢石) 등의 여러 명승이 또 그것을 따라 옆에 바둑알처럼 줄 지어 서 있다.

    앞에 열거한 것들이 천하의 절경에 처하였는데도 천하의 이름난 문장가들이 와서 보고 드러내기를 악양루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니, 탄식할 만하다.

    삼일포에 이르렀으나 배를 바다 기슭에 대었을 뿐 내리지는 않았다. 드디어 돌아서 몽 천암(夢泉庵)에 들어갔다. 암자는 삼일포의 호수 위에 있다. 삼일포는, 네 명의 신선이 이곳에서 삼일을 유람한 까닭에 호수를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세상에 전한다. 호수 가운 데 작은 섬이 있고, 그 섬의 바위 위에는 네 신선의 붉은 글씨가 있다. 또 그 동쪽에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선조인 송재공(松齋公)이 일찍이 강원도(江原道) 안절사(安節使) 가 되었을 때 그 위에 시를 지어 적었는데, 지금 그 판이 아직도 있다.

    저녁에 비를 만나 발연사(鉢淵寺)에 들어갔다. 절은 구정봉의 동쪽에 있다. 절의 승려가 예전부터 내려오던 행위인 알몸으로 연못에 들어가 돌 사이를 따라가다 폭포에 이르러 몸을 던져 빠르게 내려가게 하여 구경거리를 제공하였는데, 내가 사람을 가지고 장난하 는 것을 싫어하여 그치게 하였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 산을 따라 남쪽으로 오십 리를 갔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북으로 가서 백천교(百川橋)에 이르렀다. 절의 승려가 견여 두 개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 개 여기서부터는 길이 험하여 다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 말을 놓고 견여를 타서 단 풍나무 숲을 지나갔다. 물이 철철 소리를 내며 절벽 가운데로 흘러내려갔다. 승려에게 앞길을 물으니 흰 구름 사이를 가리키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에서 벗어난 생각이 들 게 하였다. 험한 곳을 만나면 곧 걸어갔다. 저녁에 구점(狗岾)에 올랐는데, 그 위에 노춘 정(盧偆井)이 있었다. (그에 대한 고사가) 말이 허탄하여 증거를 댈 만하지 않다. 돌 위에 조금 앉았다가 고개를 돌려 삼일포를 바라보니 산의 반허리에 석양이 비추고 있었다. 그 바깥에는 만 리의 바다에 파도가 치며 바람에 돛배가 달리고 있었다. 장항(獐項)을 넘어 삼협교(三峽橋)와 단풍교(丹楓橋)를 지나 명월교(明月橋)에 도달하였다. 달빛이 산에 가 득하여 산 그림자가 은은하였다. 산영루(山影樓)에 들어갔다. 누대는 유점사(榆岾寺)의 앞에 있었는데, 돌 다리를 깔고 앉은 형세였다. 물은 누대의 바닥을 따라 누대를 지나간 다. 앞에는 오래된 잣나무가 대단히 많았다. 밤에 절에서 잤다.

    새벽에 이르러 종소리와 풍경소리를 들었다.

    늦은 아침에 남여를 타고 허곡암(虛谷巖)을 지났다. 6, 7리를 가자 돌길이 험하고 나무 가 더욱 울창하여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맑고 고요하여 속세의 기운이 없었 다. 물은 그 사이를 흘러 옥을 치는 소리를 낸다. 때때로 단풍이 보이는데 붉기가 피와 같아 좋아할 만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산중에 나쁜 짐승이 없어서 사람이 밤에 다녀도 꺼릴 것이 없습니다. 사냥하는 자가 감히 산에 들어와 짐승을 몰아 죽이지도 못하는데요, 죽이면 갑자기 병이 생겨 죽는답니 다.”라고 하였다

    정오에 안문점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았다. 안문의 서쪽은 산이 더욱 기이하고 색은 희 니, 이른바 내금강이란 것이다. 그 동쪽은 외금강이 되니 이로부터 길이 더욱 험하고 바 위와 골짜기는 깊어진다. 골짜기가 좁아진데다 어지러운 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녀 사람은 돌의 뾰족한 위로 걸어간다. 안문점에서 부터 장안사(長安寺)까지 30리 길이 모두 그렇다. 일관(日觀), 월관봉(月觀峰)의 아래를 지나고 묘길상(妙吉祥)의 옛터를 지나서 마하연암(摩 河衍庵)에 들었다. 마하연은 중향성(衆香城)의 아래에 있는데, 승려기 없어 비어 있다.

    사자봉(獅子峰)을 지나고 화용담(火龍潭), 선담(船潭), 귀담(龜潭), 진주담(眞珠潭), 벽하 담(碧霞潭), 백룡담(白龍潭), 흑룡담(黑龍潭)을 구경하였다. 담 위는 석응봉(石鷹峰)이고 절벽의 아래는 보덕굴(普德窟)이다. 철주를 세워 허공에 얽어매어 누대를 지었는데, 지금 은 폐하여 아무도 살지 않는다. 대향로봉(大香爐峰), 소향로봉(小香爐峰)을 지나 아래로 선유암(仙遊巖)에 이르렀다. 물이 더욱 품어내며 내달렸으니 이른바 만폭동(萬瀑洞)이다. 일명 청학동(靑鶴洞)인데 그 위는 청학대(靑鶴臺)이다. 옛날에 청학이 그 위에 와서 살았 다. 절로 안문의 길을 통하여 청학은 백마봉(白馬峰)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돌 위에는 옛날과 지금 사람의 새긴 이름이 많았는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여덟 자의 큰 글 씨가 물 가운데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글자체가 날아오르는 것 같다.

    골짜기를 지나 석문을 거쳐 표훈사(表訓寺)로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길을 재촉하여 정양 사에 오르니, 석양 무렵에 이미 방광대를 지났다. 한 노승이 앞에 와서,

    “비가 새로 내렸다가 (지금 그쳐) 산중에 구름이 없으니 여러 봉우리의 면면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급히 올라가시어 뒷날을 기다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기에 그 말을 따랐다.

    드디어 곧바로 천일대에 도달하였다. 올라가니 여러 봉우리들이 눈앞에 벌여있다. 먼 것은 하늘가에 아득하고, 가까운 것은 대 아래에 단정히 읍하고 있다. 큰 것은 장엄하며 날카롭게 깎여있고, 작은 것은 어여쁘고 교묘하였다. 뾰쪽한 것은 세워 놓은 붓과 같거 나 창을 나열한 듯 하였고, 둥근 것은 술동이 같거나 창고 같았다. 입을 벌린 듯 이지러 진 것은 성가퀴 같고, 갑자기 솟은 것은 엎어놓은 종 같다. 가로로 놓인 것은 기를 눕히 거나 장막을 겹쳐 놓은 것 같고, 세로로 서 있는 것은 홀을 단정히 하거나 준순을 묶은 것 같다. 숨어 있는 것은 조심스러운 여인이 담장을 엿보며 얼굴을 반쯤 드러낸 것 같고, 나타난 것은 단정한 선비가 모자를 바르게 하고 승상에 기대 있는 듯 하다.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신선의 동자와 같고, 우뚝 서 있는 것은 경험이 많은 사람과 같다. 내려와서 앞에 있는 것은 누대와 전각에서 내려온 것 같고. 솟아오르며 뛴 듯한 것은 도약하는 호 랑이나 비상하는 용인듯 하다. 가는 것은 돌아가는 것 같고 오는 것은 돌아오는 것 같다. 굽힌 듯 우러른 듯, 절을 하는 듯 춤을 추는 듯, 향하는 듯 등지는 듯, 일어나는 듯 엎드 려 있는 듯, 모이는 듯 흩어지는 듯, 나아가는 듯 물러나는 듯, 거꾸러져서 떨어지는 듯 뛰어가 내달리는 듯 하였다. 그러나 비로봉은 우두머리처럼 우뚝 서서 (이 모든 산들의) 마루[宗]가 되니 엄중하여 공경할 만하다. 통틀어 말한다면, 흰 구름이 만 겹으로 덮여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기이한 모양이라 낱낱이 형용할 수가 없다. 유군이 돌아보고 웃으며 나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지 않다면 어찌 금강산이 되겠는가? 지금 참으로 잘 보았으니 어찌 천고의 통쾌 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나는 묵묵히 응답하지 않았다.

    절로 돌아왔으나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헐성루에 올랐다. 누의 가운데에서 보는 것은 천 일대에서 보는 것과 대략 비슷하였다. 나는 매우 기뻐 오랫동안 떠날 수 없었다. 얼마 후 문득 우레소리가 서북쪽에서 나고 검은 구름이 중향성을 넘어 내려오니 바위 골짜기 가 어두워지고 번개의 섬광이 번득였다. 큰 바람과 비가 골짜기를 휩쓸며 진동하였으며 모든 폭포가 우레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내었다. 내가,

    “장엄하도다! 오늘 저녁에 가을 달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승려가,

    “이것은 소나기입니다. 장차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비가 그쳤다.

    이경의 밤에 달빛이 대낮과 같고 구름은 전혀 없었다. 유군이 일어나 옷을 걷고 나를 부 르니 (나는) 급하게 누대에서 나와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바위와 여러 골짜기에 (달빛이) 밝고 깨끗하여 중향성의 남쪽으로부터 망고대(望高臺)에 이르기까지 흰 구름이 산을 덮 은 것만 같았다. 급히 술을 찾아 몇 순배를 돌렸다. 이날 밤에 절 에서 잤는데, 정신과 육체가 모두 맑아 아침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깐 비가 내리다가 잠깐 개기도 하 고, 구름과 안개를 토했다 삼켰다 하다가 이윽고 햇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고 고운 노을이 아른거리니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하였다. 절의 승려가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의 발을 내와서 보여주었다. 절에는 육면무량각(六面無量閣)이 있는데, 벽 위의 불상은 오도 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다.

    저녁에 산을 내려와 삼장암, 표훈사, 백화암(白華庵)을 거쳐 명연(鳴淵)을 지나 장안사 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유점사로 돌아왔다. 나아가 외수점(外水岾)으로 가는 길을 따라 금장암(金莊庵)의 옛터를 거쳐 외수첨에 올랐다. 서쪽으로 단발령(斷髮嶺)이 보였다. 서쪽으로부터 와서 이 산에 들어온 자들은 이 고개에 오르면 비로소 금강산을 볼 수 있다. 치재(恥齋) 홍인우 (洪仁佑)의 '유산기(遊山記)'에 '삼군이 상복을 입고 칼과 창이 서로 향하게 하였다'라 한 것은 대개 실제의 기록이다. 우리 세조께서 유람할 때에도 제단이 있었다고 한다. 고개 위에 잠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먹고 나서 서둘러 고개를 내려왔다. 산중의 승경이 이곳 에 이르러 다했다. 그러나 오히려 구름 낀 골짜기는 아늑하고 붉은 색의 단풍과 푸른 나 무들이 서로 비추니 기뻐할 만하다. 왼쪽으로 돌아 유점사에 들어가서 잤다.

    다음날 동쪽으로 은선대(隱仙臺)에 올라 열 두 폭포를 바라보고 송림굴(松林窟)을 보려 했으나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구점(狗岾)을 따라 산을 나왔다. 백천교에 이르러서 말을 타고 대강역(大康驛)으로 나왔다.

    바다를 끼고 사흘을 가서야 동해의 신묘(神廟)에 이르러, 조정의 명으로 동해신에게 제 사를 지냈다.

    날이 밝자 해안에 나와 일출을 보았다. 바다 물결이 하늘에 닿을 듯한 가운데 태양이 솟아오르니 또한 장관이다. 돌아와 고을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본 바를 대략 말하였다.

    아아, 천하의 산 중 우뚝 높고 큰 것을 일일이 셀 수 없다. 즉 오악은 논할 것도 없고 천 태산, 안탕산(雁蕩山), 청성산(靑城山) 같은 것은 모두 신선이 사는 곳으로 천하에 알려 진 것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진 기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이른바 1만 2천 봉이란 것에다가 또한 큰 바다가 그 밖을 에워싸며, 귀신이 깎은 옥인 섞인 듯 아름다우니 이와 같은 것은 대개 천하에 짝 짓을 것이 없다. 말하는 자들은 봉래 양사언 이 칭찬했다는 것과 중국 사람들도 동국에 태어나서 한번 보기를 소원한다고들 말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더러운 세속에서 벗어나 세상 밖의 광대한 저곳을 몸소 찾아다니 며 홀로 하루 동안에 천하의 대단한 명승을 다 보았는가? 바람과 우레와 구름과 달이 경 각에도 자주 변하여 앞에서 서로 대신한 것은 아마도 귀신이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어찌 그리 통쾌한가? 비록 그렇지만 옛날의 이른바 산수의 즐거움이란 것은 어찌 우뚝 높 은 산과 깊이 흐르는 물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반드시 마음에 즐기는 바가 있어야 하 니, 우리들은 이것에 대해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겠는가? 이번 여행에 대해 각각 시를 지어 본 것을 기록하여 무릇 약간의 수를 얻었다 유람할 시간이 없는 이들이 잠시 이것 에 마음을 붙여서 다른 날은 기다리게 하련다.

    이 해 8월 현산관(峴山館)의 태평루(太平樓)에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