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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蘘陽의 漢詩

    345.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남효온(南孝溫) / 한글번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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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더구나 그때에 문적(文籍)이 희귀하여 사람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였는데, 서역의 사적 을 말한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제6의 큰 망언이니, 민채의 황당무계함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여섯 가지 큰 망언이 있고 한 마디도 명교에 보탬 될 것이 없으니, 이 기록은 빼버 리는 것이 옳겠다. 더구나 삼국의 초기에 사람이 일정한 성이 없고, 이름 자도 사람의 이름과 같지 않은즉 노춘이란 이름부터가 후세에서 지어 넣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어찌 신라 말엽에 학식 있는 술승(術僧) 원효(元曉)、의상(義相) 율사〈律師)의 무리들이 비로소 이 산의 사적을 과장하고자 하여 추후에 써놓은 것이라 아니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도 그릇된 점이 많단 말인가. 두루 다 구경하고 누각으로 나 와 앉으니, 명(明)이 우리를 위하여 냇가에까지 보내주었다. 개복대(改服臺)를 지나니 이 대는 바로 지난 병술년에 유점사에서 불공할 적에 거가(車駕)가 옷을 바꿔 입던 곳이다. 또 단풍교(丹楓橋)를 지나자 다리 머리에서 잠깐 쉬었고, 또 장항(獐項)을 지나다가 말을 가지고 나를 맞기 위하여 온정(溫井)으로 오는 자를 만났다. 그래서 말을 타고 구점(狗岾)을 넘는데, 길이 험악하여 혹은 말을 타기도 했고 혹은 걷기도 했다. 이대석(尼臺石) 을 지나서 마루로부터 평지에 당도하여, 건천(乾川) 가에서 요기를 하고 준방(蹲房)을 지 나서 고성군(高城郡)에 도착하였다. 유점사에서 여기까지는 60리였다. 태수(太守) 조공 (趙公)은 나의 조부와 더불어 좋아하는 처지라, 나를 보고 후히 대우하였다. 때마침 양양 군수(襄陽郡守) 유자한(柳自漢)이 먼저 와서 좌상의 반찬을 준비하였다.

    갑신일에 태수 조공이 유양양을 위해 삼일포(三日浦)의 놀이를 하게 되어 나도 따라갔 다. 삼일포는 신라 시대에 화랑(花郎) 안상(安祥)、영랑(永郎)의 무리가 와서 3일 동안을 놀고 파했다. 그래서 이름이 되었다. 포구의 암벽(巖壁) 사이에 단서(丹書) 여섯 글자가 있는데,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라고 한다. 수면(水面)에서 4、5리를 가면 돌섬 하나가 있 고, 낙락장송이 두어 그루가 있으므로 이름을 송도(松島)라 하고, 동남의 모퉁이에서 바 라보면 돌이 거북 모양과 같으므로 귀암(龜岩)이라 하고, 귀암의 뒤에 하얀 바위가 바닷 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름을 설암(雪巖)이라 한다. 물 북쪽에 몽천사(夢泉寺)의 옛 터가 있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나는 훈도(訓導) 전대륜(全大倫) 및 유양양을 따라, 배를 타고 송도에 정박하였다가 또 배를 노질하여 단서(丹書)가 있는 암벽(巖壁) 아래 당도하니, 과연 여섯 글자가 있어, “영 랑도 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하였는데, 그 글자가 돌에 심한 공격을 받았다. 전대륜 은 말하기를, “옛날에 손님을 싫어하는 태수가 있었는데, 손이 이 고을에 오게 되면 반 드시 단서를 보고자 하는 고로, 태수가 그 비용을 대어 주기 싫어서 쳐부숴버리려고 했 다.” 한다.

    그러나 그 글자가 획이 인멸되지 않아서 해독할 수 있다. 나는 그 글의 뜻을 물으니 대 륜은 말하기를, “영랑(永郎)이란, 신라 사선(四仙)의 하나요, 남석(南石)은 이 돌을 지적한 것이요, 행(行)이란 돌 위로 간다위로 간다. 세상의 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이 돌이 고성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금강에서 보면 동북간에 있고, 동해 바다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데, 그 '남석,이라 칭한 것은 더욱 해득할 수가 없 고, 또 여섯 글자가 하나의 문장이 되는데, 문리(文理)가 대단히 소략(疎略攩理)하여 아 이들의 솜씨와 같으니, 옛 사람의 문법이 응당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좋아 하는 아이들의 손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면 곧 수랑의 무리 가운데 남석행(南石行)이란 성 명을 가진 자가 제 이름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배를 멈추고 돌 위에 오르니, 그 정상(頂上)에 미륵불(彌勒佛)을 위한 매향비(埋香碑)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운 것이다. 배를 타고 송도로 돌아와 종일토록 술을 마시고 노는데, 반찬이 매우 풍성하였다 혹은 어부를 시켜 고기를 그물질하여 회를 쳐서 먹기도 하고, 혹은 연구시(聯句詩)를 지어 부 르고 화답하기도 했다. 오후에 큰 바람이 부니 태수는 무서워서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나 는 온정(溫井)으로 돌아왔다.

    을유(乙酉)일에 온탕에 들어가 목욕하고, 병술(丙戌)일에 목욕하고, 정해(丁亥)일에 목욕 하며 무자(戊子)일에 목욕하고 나와 쉬었다. 기축、경인 양일간에 다 쉬었다. 가서(家書) 를 받았는데 자당께서 안녕하시다고 했다.

    신묘(辛卯)일에 회정(回程)하여 온정을 떠나가면서 고사리를 캤다. 고성군을 지나고 또 만호도(萬戸渡)를 지나서 배를 타고 고성포(高城浦)를 건너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영동(嶺東)의 민속이 매년 3、4、5월 중에 날을 가려 무당을 맞이하여 수륙(水陸)의 별 미를 성비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부자는 말바리로 실어오고, 가난한 자는 이고 지고 와서 신전에 차려 놓고 피리를 불고 비파를 타고 연 삼일을 재미나게 놀고 취해 배 부른 연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내려와 사람과 사고팔고 하며, 만약 제사를 아니 지내면 한 자치 베도 사람과 매매를 못한다. 고성의 민속제는 바로 이날인지라, 가는 길 곳곳마 다 남녀들이 몸단장을 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왕왕 저자와 같이 많 이 모인 데도 있었다. 설암(雪巖)을 지나니 설암의 이남에는 기묘한 돌이 몹시 많았다. 안창역(安昌驛)을 지나서 안석도(安石島)에 오르니 잘잘한 돌이 밑으로 연하고, 전죽(箭竹)이 덤불을 이루며, 전죽 아래는 해당화가 있고 해당화 아래는 하얀 돌이 있어, 혹은 평평하고 혹은 솟고 혹은 쌓이고 혹은 부숴졌다.

    나는 섬 아래서 한바퀴 돌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실컷 구경하다가 도로 나와 구장천 (仇莊遷)을 지나니 역시 기묘한 곳인데, 옹천(瓮遷)만은 조금 못하다. 사천(蛇川)을 건너 명파역(明波驛)을 지나 냇가에서 요기하고, 술산(戌山)을 넘어 다시 바닷가를 따라 무송정 (茂松亭)에 당도하니 정자는 바로 바다 굽은 턱에 있는데, 역시 육로(陸路)와 연결하여 장 송(長松)이 그 맨 꼭대기에 나고, 하얀 돌은 그 기슭을 이뤘다. 그리고 안석(安石)에 비해 몇 배가 높은지 알 수 없다. 열산(烈山)을 지나서 간성(杆城) 땅에 들어가 포남(浦南)에 있 는 어떤 민가(民家)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에 바다를 따라 행한 것이 모두 1백 20리였다.

    임진(壬辰)일에 비를 무릅쓰고 포남에서 출발하여 반암(盤巖)을 지나 19리를 가니 비가 몹시 퍼부어서 간성(杆城) 객사(客舍)에서 유숙하는데 태수 원보곤(元輔昆)이 술밥을 보 내와서 운산은 취해 넘어졌다.

    계사(癸巳)일에 비가 갰다. 출발하여 문암(門巖)을 지나 바다를 따라 45리를 가서 청간 역(淸澗驛)에 당도하니, 누가 물가에 가까이 있고, 누의 뒤에는 절벽이 깎아지르고, 누 앞에는 많은 돌이 쫑긋쫑긋 솟았다. 나는 누의 뒤 절벽 위에 오르니, 바라보이는 것이 더욱 넓어 서쪽으로 설악(雪岳)을 보니 비가 내리 쏟아지는 것 같은데, 하늘 남쪽에는 해 가 중천에 둥실 떴다. 그리고 앞에는 바다가 어둑하고, 뒤에는 꽃이 환하여 절묘한 경치 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절벽 위에서 요기하고 또 바닷가로 행하여 사령(沙嶺)의 해 안을 지나니 이때에 동남풍이 거세게 불어 바다 물결이 기슭에 대지르는데, 천병(千兵) 만마(萬馬)가 몰아서 노는 것 같았다. 물이 부딪는 곳에 붉은 무지개가 건각에 나타났다 도로 사라지곤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죽도(竹島)를 바라보니 백죽(白竹)이 연기와 같 고, 개울 밑 돌 위에 해달(海獺)이 줄지어 떼로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물소리와 더불어 어울려 해안에 진동하였다.

    또 부석(腐石)에 당도하니 청간(淸澗)에서 여기까지는 20리이다. 또 바른편으로 천보산 (天寶山)을 지나 송정(松亭)에 당도하여 여기서부터 낙산(洛山)을 바라보며 20리를 가서 낙산동(洛山洞)에 들어갔다. 또 10리를 가서 낙산사(洛山寺)에 당도하니, 지나는 길에 피 택(陂澤)이 많아서 그 크기를 10리 혹은 20여리 되는 것이 여섯이나 된다.

    그리고 두 곳의 큰 개와 두 곳의 큰 내를 건너고 죽도(竹島)를 셋이나 지났는데, 기암 (奇巖) 괴석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낙산사는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인데, 그 절의 중이 그 사적을 전하기를, “의상이 직접 관음(觀音) 대사를 해변 굴속에서 만나 니 관음이 친히 보주(寶珠)를 주고 용왕(龍王)이 또 여의주(如意珠)를 바치기에 의상은 두 구슬을 받았다. 이에 절을 짓고 전단토(旃檀土)를 가져다 손수 관음상을 만들었다. 지 금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굴이 바로 관음의 머무른 곳이요, 뜰 가운데 있는 석탑이 바로 두 구슬을 수장한 탑이요, 관음 소상은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이다.” 한다. 무자 (戊子) 연간에 요승(妖僧) 학열(學悅)이란 자가 있어 나라에 아뢰어 절터에다 큰 법당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곁에 있는 민간의 전답을 다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학열이 죽은 지 1년인데, 그 도제 지생(智生)이 일찍이 학열에게 곱게 보였던 관계로 학 열이 죽자 노비(奴婢) 전답, 재물을 다 얻어서 그 이익을 관리하고 있다. 절 앞에 정자 하나가 바닷가에 가까이 있고, 감나무 숲이 여러 겹을 두르고, 대와 나무가 온 산에 가 득하다. 나는 정자에 올라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정자를 내려와 언덕 밑을 지나서 큰 대 숲에 갔다가 도로 주사(廚舍)를 지나서 곡구(谷口)로 내려가 왼편으로 암석(巖石)을 거쳐 조그마한 댓가지를 헤치고 반 마장쯤 가서 이른바 관음굴이란 곳에 당도하니, 조그마한 동불(銅佛)이 굴속의 조그마한 실내에 있어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고 방 아래서는 파도 물결이 돌을 대질러 산 형상이 흔들리는 듯하고, 지붕 판자가 노상 울린다. 나는 내려와 동구에 당도하자 운산이 중 계천(繼千)을 데리고 와서 나를 맞아 절로 들어가니 지생이 나와 영접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갑오(甲午)일 이른 아침에 나는 정자에 올라 앉아 해뜨는 것을 구경하였다. 지생이 아 침 식사를 대접하고 나를 인도하여 관음전을 구경시키는데 이른바 관음상은 제작한 기 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정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전 앞에 정취전(正趣殿)이 있 고, 전 안에는 금불 셋이 있다. 나는 출발하여 남쪽 길로 가다가 서쪽으로 접어들어 20 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 냇가에 당도하여 말을 쉬게 하고, 또 10리를 가서 설악(雪 岳)으로 들어가 소어령(所於嶺)을 올라 고개를 내려오니 냇물은 왼편에 있고, 봉만(峯巒) 은 바른편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서 냇물을 건너 왼편으로 가니 물은 맑고 산은 빼어 나고 하얀 돌이 담 쌓여 대략 금강산의 대장동과 같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 (五色驛)을 당도하니, 하얀 달이 벌써 산 위에 둥실 높이 떴다. 이날 뭍으로 30리를 걷고 산으로 40리를 걸었다.

    을미(乙未)일에,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지나니, 설악산이 무려 수십여 봉 우리인데, 정상은 모두 희고, 시냇가 돌과 나무도 또한 희게 보인다. 세상에서 작은 금강 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헛된 말이 아니다. 운산이 말하기를, “매년 8월에 다른 산은 서리 가 미처 오지 않았는데도, 이 산만은 먼저 눈이 내리므로 설악이라 한다” 하였다. 재마 루 돌 위에 팔분체(八分體)로 쓴 절구시 한 수가 있는데, “무진년에 난 단군(檀君)보다 먼저 나서 기준(箕準)의 마한(馬韓)을 목도하였네. 영랑(永郎)과 함께 수부(水府)에 노닐 고, 또 술을 마시며 인간에 머물렀네.” 하였다. 먹발[墨跡]이 아직도 쌕쌕하니, 반드시 쓴 적이 오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신선이라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일 좋아하는 자가 우 연히 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정자(정이(程頤))는 “하늘에 빌어 나라 운명(運命)을 길게 하는 것과 보통 사람이 성인에 이르는 것으로써 신체를 수련하여 연령을 끌어가는 것에 비한다.” 하였으니, 깊은 산중에 역시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시를 읽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 금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들게 한다. 나는 재마루에서 동해 바다와 하직하고, 재를 내려 와 서남으로 나무 밑으로 걸어가니 길이 험악하고 골짝기가 깊숙하였다. 정향(丁香) 꽃 을 꺾어 말안장에 꽂고, 그 향내를 맡으며 면암(眠巖)을 지나 30리를 가서 말을 쉬고 신 원(新院)을 지나 또 15리를 가니 냇물이 설악의 서쪽으로부터 와서 소솔천(所率川)과 합 류하여 원통역(元通驛) 아래 이르러서는 큰 강이 되었다. 원통으로 전진하니 산천이 광 활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원통으로부터 평지를 밟고 또 25리를 가서 원통천(元通川)을 건너서 기린현(麒獜縣) 물이 여기와 합류하였다. 강을 따라 5리를 가서 인제현(麟蹄縣)에 유숙했다. 이 날에 산으로 60리를 걷고, 뭍으로 30리를 걸었다.

    병신(丙申)일에 배를 타고 병항진(瓶項津)을 건너 서、남으로 향하여 선천(船遷)을 지나 고, 또 서남으로 향하여 만의역(萬義驛)을 지나며, 또 산간으로 향하여 홍천(洪川) 땅에 들어가 천감역(泉甘驛)에 유숙했다. 모두 80리를 걸었다.

    정유(丁酉)일에 또 서、남으로 향하여 마령(馬嶺)을 넘고 또 서남으로 향하여 큰 강을 따라 내려가 구질천(仇叱遷) 영봉역(迎逢驛)을 지나 60리를 가서 홍천현에 당도하여 현 감(縣監) 백기(伯起)를 만나보고 동숙(同宿)하였다.

    무술(戊戌)일에 배를 타고 앞강을 건너 괘전령(掛錢嶺)을 넘어 백동역(百同驛) 뒷산을 거쳐 지평현(砥平縣)을 지내고, 또 천곡원(天谷院)을 지나서 서남에 돌길로 들어갔다. 이 날에 도합 90리를 걸어서 권교리(權校理) 경우(景祐)의 집에서 잤다.

    기해(己亥)일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향하여 천곡천(天谷川) 하류로 건너 오빈 력(吾賓驛) 양근군(楊根郡)을 지나고, 또 월계천(月溪遷) 우원(偶院), 요원(腰院), 말원(末 院)을 지나서 용진(龍津)을 건너 봉안역(奉安驛)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에 도합 80여 리를 걸었다.

    경자(庚子)일에 두미천(豆尾遷) 평구역(平丘驛)을 지나 중녕포(中寧浦)를 건너 70리를 향 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총계하니 산으로 향한 것이 4백 85리요. 바다로 향한 것이 2백 74 리요, 뭍으로 향한 것이 9백 37리였다. 을사 윤 4월 20일 신축에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