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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342. 유금강소기 (遊金剛小記) 신익성(申翊聖) / 한글 번역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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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고성(高城)의 모든 경내는 산, 바다, 호수, 정자는 물론이고 아주 평범한 바위라고 할지 라도 모두 뜻과 모양이 있다. 새 같은 것, 짐승 모양을 한 것들도 있고, 어떤 것은 날아 갈 듯 하기도하고 달아날 듯 하기도하였다. 남강(南江)은 바다로 흘러들었고 칠성 바위 들이 바닷가에 쭉 벌려져 있어 옥으로 된 죽순과 옥비녀인 듯하였다. 해산정(海山亭)이 내리누를 듯이 있으니 신선들이 살던 곳이라고 할 만 하다. 삼일호(三日湖) 근처에는 몽 천사(夢泉寺)의 옛 터가 있는데 규모가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맑은 정취는 오나라의 북 고와 우위를 겨를 만하다. 태수가 거사(居士)에게 작은 모옥을 짓게 하고 그것을 경영하 였다고 한다.

    삼일호 서쪽 절벽 위에는 붉은 글씨가 있는데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움푹 패여 사람의 자취가 닿기 어려웠다. 새겨진 글자의 서법(書法)이 아주 고풍스러웠으니 홍춘정(洪春亭) 이 안렴사가 되었을 때에 문장을 지어 검은 돌에 새겨서 바위를 깎아내고 새겨 넣었다 고 한다. 그 위에는 매향비(埋香碑)가 있는데 글자들이 이미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읽 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으니 대개는 향을 묻은 사람들의 성명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부용호(芙蓉湖)는 방백 정하숙(鄭下叔)이 사는 곳이다. 호수가 외금강 아래에 있어서 경 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그 주위의 골짜기도 깊숙하고 조용하면서도 씨 뿌리고 모내기 할 만 한 땅이 있어 은자들의 은거지가 될 만하였고 가마를 빌릴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감호(鑑湖)는 사방 3, 4리이고 물이 맑아서 터럭까지도 환히 비추고 앞으로는 구선봉을 마주 대하여 금강산의 향로봉과 백탑동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갖고 있다. 그 아래는 규 모가 비슷비슷하여 왼쪽에는 양사언이 살던 옛 집이 있다. 촌락이 숲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오른쪽에는 키가 큰 소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바닷가 를 가릴 정도였다. 그 소나무 너머에 사봉이 하늘을 향해서 우뚝 서 있어 옥같이 보인다. 호숫가에 있는 정자는 토호였던 정유(鄭油)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호수가 많 지만 당연히 이 감호가 제일이다.

    간성(扞城)으로 가는 길에서 바다 갈매기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서 물가 모래밭으로 내 려앉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주 기이하였다. 이리저리 훑어보는 사이에 굽이진 해안으 로 나오니 어가(漁家)들은 해안에 의지하여 있고 아녀자와 아이들이 섞여 앉아 있는 가 운데에 언덕같이 쌓아놓은 물건이 있는데 바로 잔물고기들이었다. 갈매기 떼가 와서 채 가도 꺼리지 않았다.

    동해의 거룻배는 통나무를 파내어 만드는데 너 댓 명이 탈 수 있으니, 농어를 잡는 것 으로 생업을 삼는다. 해가 뜨면 돛을 펼치고 나가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오후 서너 시쯤 하늘 밖 저쪽에 한 점이 나타났다가 잠깐 사이 물가에 닿으니 정말 가볍고 빠 르기가 나는 듯하였다. 선대(仙臺)와 능파정(凌波亭)은 모두 해상에 있는 볼거리인데 표 연한 모습이 세상을 버리고서 홀로 서 있는 듯한 의취가 있다.

    영랑(永郎)이라고 하는 이름은 단서에 쓰여 있다. 금강산에도 영랑점이 있고 고성에도 영랑호가 있으며 간성에도 영랑호가 있는데 영랑이라고 하는 이가 누구이고 또 언제 사 람인지 모른다. 영동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영랑호의 부류라고 한다. 고성의 호수 는 그윽하고 간성의 호수는 더욱 맑고 시원스런 풍경을 갖고 있다. 소나무 윲다.암혝가 있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으며 반나절만이라도 돌아다니면 영랑을 만날 것만 같다.

    고성의 수석이 기이한 곳들은 다 쓸 수 없을 정도이고, 현종암(懸鐘巖)은 마치 엎어놓 은 종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안이 벌집 같이 텅 비어 십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니 조화옹의 교묘한 솜씨를 알 수 있다.

    선유담(倦游潭)은 원래부터 신령스런 곳이다. 내가 피곤하여 소나무 뿌리에 기대어 잤 는데 꿈에서 옛 옷과 관을 쓴 사람과 즐겁게 선(仙)과 불교의 일들에 대해 말하였다. 잠 에서 깨었어도 여전히 그 이야기가 기억나니, 기이하다.

    열산호(烈山湖)는 바닷가에 있는데, 관동에서 제일 크다.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타 고 나갈 배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명사(鳴沙) 수백 리를 가마를 타고 가기도 하고 작은 누각 같은 데서 걸터앉아 있기도 하는 등 마음에 따라서 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였다. 처음 고성을 빠져나왔을 때 길을 가 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앉아서 쉬니 행차가 더뎠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경 치가 뛰어나 모두 다 감상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매향포(埋香浦), 우두대(牛頭臺), 화 진포(花津浦) 등 몇몇 곳은 경치가 더욱 기이하였다.

    9월 13일

    청간정(淸澗亭)에 이르렀다. 환한 달빛과 바다 파도가 서로 넘쳐흐르고 하늘에는 구름 조차 없어 대낮같이 밝았다. 이에 내가 만경대에 올라 돌을 베고서 누웠더니 밤이 깊어 지자 서늘한 이슬이 옷을 적시었고 맑은 기운이 뼈에까지 스며들었다. 노복에게 만경대 아래에서 피리를 불도록 하였는데 어룡이 모두 솟아 올라올 것만 같았다. 이 밤, 이 달 을 천하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나처럼 득의해서 바라보는 이도 없을 것이다.

    청간정은 아주 바다 가까이에 있어 사나운 파도가 뜰까지 칠 때면 그 소리가 아주 웅 장하였다. 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당나라 사람이 시에서 '조수(潮水) 소리는 처음 온 나그네를 근심스럽게 하는구나.'라 한 것이 사실이었다.

    청간정 기둥에 비스듬히 쓰여진 글자 20개가 있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나그 네가 되었을 때 쓴것으로 그 후 사람들이 새겨 넣었는데 그 세월을 헤아려보니 소재의 나이 23세 때 쓴 것이다.

    명사라고 하는 것은 모래를 밟았을 때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데 관동 수백 리에 걸쳐 그 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해당화가 그 위에 줄지어 피면 마치 담요를 펼쳐놓은 듯, 비단 장 막을 둘러쳐 놓은 듯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금앵도 같은 열매를 맺는다. 

    바닷가의 길이 모두 명사이기는 하지만 드문드문 바윗길도 있는데 반드시 파도 가운데 서 돌출하여 대를 이루니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다. 평지에는 반드시 푸른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푸른 일산 같이 수백 리에 뻗쳐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소나무 아래로 다닌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기운이 있다

    천후산(天吼山)은 양양(襄陽)에 있다. 골짜기와 산봉우리가 금강산과 나란히 일컬어질 만하다. 하늘을 향해 곧바로 솟아 있으면서 크지는 않지만 이름난 가람이 많은 정토(淨 土)라서 암자를 짓고 사는 고승들이 많다고 한다.

    내가 일출을 세 군데에서 보았었는데 그 중 해산정에 머문 것이 가장 길었으나 비가 자 주 와서 세 차례만 보았을 뿐이다. 청간정, 낙산사(洛山寺)에서는 모두 맑게 개였었는데 낙산사에서 본 것은 더욱 대단하였다. 세상에서 낙산의 일출을 일컫는 것도 연유가 있다. 양양의 수령이 낙산사 이화정(梨花亭)에서 내게 술을 대접하였다. 술에 반쯤 취하자 의 상대(義相臺)로 자리를 옮겼다. 몇 개의 점이 저쪽 하늘가에서 오는 것이 보였는데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고깃배가 도착한 것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하얀 돛이 물가에 닿아 바다의 진미를 제공하여 실컷 술을 마셨다. 자리에 있던 어린 기생이 송강(松江) 정철(鄭 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불렀는데 매우 맑고 아름다워 듣노라니 정신이 새로웠다.

    상운역(祥雲驛)의 유객당(留客堂)이 자못 깨끗하였다. 뜰 가의 오죽은 울창하여 사랑할 만했다. 한 쪽은 바다로 이어졌는데 키 큰 소나무들이 수십 리에 뻗어 있으면서 흰 모래 위에 그늘을 드리웠으니 관동의 명소이다. 역관이 배 다섯 개를 가져왔는데 그 크기가 여러 되나 되는 바가지만 하였다.

    강릉의 경계로 들어가니 지세가 매우 넓고 마을은 풍요로웠다. 관란정(觀瀾亭) 아래 푸 른 소나무가 시냇가를 따라서 십리에 펼쳐져 있었다. 때는 깊은 가을로 해상의 가을빛은 매우 더디게 비추었다. 아주 울긋불긋한 붉은 잎들이 볼 만하였다. 정자에는 지어놓은 시들이 벽에 가득하였는데 모두 벼슬아치들의 시였다. 세월을 따져보니 5, 60년이나 되 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자도 있었다. 아! 세상의 유명한 벼슬아치들이 헛된 성명을 훔 쳐 한때에 드날리지 않음이 없으나 죽고 나서 후에 이름이 일컬어 지지 않음이 이와 같 으니 슬프도다.

    우두대가에는 단정하게 단장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보니 강릉에 적을 두고 있는 기생 옥랑(玉娘)이었다. 젊었을 때 평강(平康)에서 같이 있다가 보지 못한 지 십여 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머리 땋은 어린 기생이었는데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그녀도 내 수염 과 머리를 보고서 놀랐다.

    강문교(江門橋)를 건너 호숫가 숲 사이에 은근히 보이는 누각을 바라보니, 붉게 칠해져 우뚝 솟아 올라온 것이었다. 말을 타고 가서 사립문을 두드려 보니 정자는 비었고 주인 은 없었다. 뜰가에 있는 푸른 오동나무와 쭉 뻗은 대나무는 사람의 뜻을 아는 듯 하였고 안팎의 호수와 바다가 기이함을 서로 뽐내는 듯하였다. 때마침 해가 기울어 석양이 호수 에 물들었고 바다의 파도는 하늘 끝까지 맞닿아 고요한 듯하였다. 해상에서 제일가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