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蘘陽의 漢詩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344. 관동록(關東錄-耻齋集) 홍인우(洪仁祐) / 한글번역

    페이지 정보

    조회 24회

    본문

    5월 1일, 병오일

    아침이 되자, 함께 여행하였던 성정(性淨)은 유점사를 향해 떠났고 우리는 남쪽으로 갔 다. 3리를 가니 남강(南江)이 나왔다. 이 강의 원류는 셋이라 한다.

    하나는 비로봉의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구룡추(九龍湫)를 만들고 일출봉, 월출 봉, 구정봉 세 봉우리를 감싸 안으면서 대병암(大明菴)을 지나 온정(溫井)을 거쳐 20여 리를 흘러 발연천(鉢淵川)과 합쳐지니, 이른 바 세존백천(世尊百川)이 이것이다. 또 하나 의 원류는 환희점(歡喜岾)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소인곶을 거쳐 발연사를 지나 15, 6리를 흘러서 용추천과 합류한다. 다른 하나는 고정봉 서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운서굴(雲栖窟)과 외개심암(外開心菴)을 지나 십이폭이 된다. 10여 리를 흘러서는 유점사 천과 합류되니 이른 바 성문 [성문(城門)은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성문(聲聞)이라고 써 야 하며, 이는 부처의 명호” 라고 하였다.] 백천(城門百川)이 이것이다. 백천은 대개 동남 쪽으로 흘러 주연(舟淵)을 이루고, 또 남쪽으로 흘러서는 흑연(黑淵)이 되며, 감돌아 북 으로 흘러서는 전탄(箭灘)이 된다 한다. 이들 세 원류는 모두 이곳에 이르러 남강이 되 며, 동쪽으로 흘러 고성포(高城浦)로 들어간다.

    마침내 누선(樓船)에 올라 강을 건넜다. 이날 구름이 짙게 끼고 안개로 앞이 어둑하여 풍악산(금강산)의 동쪽 지맥을 장쾌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귀신이 시기를 해서인가 싶었다.

    60여 리 떨어진 명파역(明波驛)까지 가서 쉬었다. 밥을 먹고는 다시 10여 리를 가서 열 산현(烈山縣)을 지났다. 열산현의 북쪽 2리 무렵에는 큰 호수가 있었는데, 그 둘레는 수 십 리나 되는 듯 넓었다. 언덕과 골짜기〔陸谷〕가 호수를 감싸고 있었는데 물이 가득하 여 넘실거렸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큰 홍수로 인해 옛날 한 현이 물속에 잠겼는데, 하늘이 맑아지고 물결이 잔잔할 때에는 그 현에 있던 집들과 담장이 그대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거탄천(巨呑川)을 건너서 간성군(杆城郡)의 한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날 여정은 바닷길 100리였다.

    5월 2일, 정미일

    아침이 되자, 군수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초청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관아로 가서 그를 잠깐 만났다.

    그리고는 출발하여 11리를 가니 선유담(仙遊潭)에 이르렀다. 산과 나무들이 어지러이 두루 둘러싸면서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고 그 안에는 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남쪽으로 호 수물에 반쯤 잠긴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큰 소나무 아래로 작은 그늘이 있어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보니 순채(蓴菜)가 호수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출발하여 7, 8리쯤 갔다. 눈과 같은 하얀 모래가 밝히고 있었는데, 사람과 말이 밟 을 때마다 쟁쟁 소리가 났다. 바로 명사(嗚沙)였다. 영동 지방의 바닷길은 모두 그러한데,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의 모래소리는 더욱 맑았다. 또 해당화가 있어 어떤 것은 어지러 이 피어있고 이미 열매를 맺은 것도 있었는데, 자못 기이하여 아름답다.

    능파도(凌波島) 부근에 이르렀다가 이 섬에 올랐는데, 섬의 서쪽은 모랫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빼어난 봉우리가 바다 어귀까지 솟아 있는데, 기암괴석들이 종횡으로 섞여 있었 다. 우리 세 사람은 각기 한 봉우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서 바다의 경치를 즐겼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또 끝없어 보이는 푸른 바다는 탁 트인 채 그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었다. 잠시 후 갑자기 동풍이 불자 성난 파도가 해안을 들이쳤다. 마치 천군만마가 마구 달려오는 듯하였다.

    또 호수 하나를 지나 소나무 숲길 20리를 가서 청간역(淸澗驛)에 이르렀다. 역에 있는 정 자는 바다와 겨우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약간 동쪽으로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 데 그 높이는 수십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아 래로는 흩어진 돌들이 바닷가에 어지러이 꽂혀있었다. 바닷물의 맑기는 청동 거울 같았 다. 간혹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사방으로 흩날렸다. 동쪽으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햇살이 너무 밝고 고왔다. 하지만 서쪽으로 설악산을 바라보니 비 기운을 머금은 구름이 먹을 뿌려놓은 듯 검었다.

    해부(海夫) 네댓 명이 천 길 파도 속을 들락날락 하면서 전복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날 여행길은 바닷길 45리였다.

    낙산사(洛山寺)를 둘러보다

    5월 3일, 무신일

    새벽, 안개가 잔뜩 끼어 어둑해 기대했던 일출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하늘이 장쾌한 감상거리를 주려하지 않는가 싶었다.

    일출 보기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서 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5리를 가니 넓은 호수가 나왔다. 그리고 또 10리를 가니 영랑호(永郎湖)가 있었는데, 그 둘레는 20여 리나 됨직하 다. 굽이져 도는 호수의 물가에는 온통 기암괴석이다. 호수 동쪽의 뚝 잘린 작은 봉우리 는 호수 속에 잠겨 있었다. 바닷길 곳곳에는 방풍(防風)이 어지러이 나 있어, 하인을 시 켜서 수백 뿌리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영랑호에서 5리를 가서 쌍성호(雙城湖)를 지났다. 쌍성호 서쪽 10여 리 되는 곳에 석봉 (石峰) 하나가 보였는데, 마치 울타리처럼 꼿꼿하게 비껴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산(籬山)으로, 속언으로는 읍산(泣山)이라 한다 하였다. 호수 동쪽으로 또 바위산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육지와는 실 같은 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비선대(秘仙臺)였다.

    23, 4리를 가니 낙산동(洛山洞)이 나왔다. 서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 숲길로 들어갔더니 낙산사(洛山寺)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낙산사의 동쪽은 큰 바다와 접해 있어 경관과 흥 취가 완상할 만했다. 시 구절 하나를 지어 동행에게 보여 주었다.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지의감로천부수(地疑甘露天浮水) 땅은 감로 땅인 듯한데 하늘은 물 위에 떠있다 경승고소해작린(境勝姑蘇海作隣) 고소산 보다 나은 경치, 바다와 이웃했기 때문 이날 바닷길 60여 리를 갔다. 낙산사 동쪽 별채에서 묵으면서,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 니 홀연 고래 떼가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5월 4일, 기유일

    새벽이 되었지만, 구름으로 일출을 볼 수 없어 하늘에 안타까움만 토로하였다. 아침이 되어서는 동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었다. 끝없이 퍼져있는 대나무를 헤치면서 1 리쯤 가니 절 2칸이 굴 위에 얽힌 듯 있다. 파도가 그 아래로 들락거리며 바위에 부딪치면서 우렁 차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낙산사 주지 휴정(休靜)은 불학 (佛學)에 상당히 통달해 있었지만 약간 교만하여 그와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날 정오에 7, 8리쯤을 가서 대포(大浦)를 지났다. 대포는 만호(萬戸)의 군영이 있는 곳 이었다. 다시 5리쯤 가니 큰 시내가 있기에 시냇가에서 쉬면서 밥을 먹었다. 저녁 무렵 양양(陽陽)에 도착했다.

    5월 5일, 경술일

    비가 왔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는 김기복(金基福)의 만류로 머물면서, 고을 원님인 남사 문(南斯文)의 술대접을 받았다.

    5월 6일, 신해일

    비가 왔다. 앞강이 너무 불어나 건널 수 없었다.

    5월 7일, 임자일

    날이 개지 않았다. 또 술에 취해 다시 쓰러져 잤다

    5월 8일, 계축일

    김기복은 풍악산을 향해 떠났다. 우리 세 사람도 남사문과 이별을 고했다. 찰방(察訪) 박 자정(朴子正)과 함께 배를 타고 남천(南川)을 건넜다. 25리를 가서 상운역(祥雲驛)에 묵게 되었는데, 박자정은 바로 이곳의 주인이었다 또 술에 몹시 취했다.

    5월 9일, 갑인일

    15, 6리를 가서 관란정(觀瀾亭)에서 쉬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관란정 주변으로는 만 그 루의 큰 소나무들이 정자의 동남쪽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정자의 서쪽 2리에 동산관(銅 山館)이 있었다

    다시 출발하여 연곡현(連谷縣)의 경계에 이르렀다. 바다가 물을 끼고 도는 굽이마다 기 암괴석이 늘어서 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정도였다. 모래는 희고 바다는 푸르니 맑은 흥취가 저절로 일어 갑자기 말에서 내려 모래 위에 몸을 던져 미친 사람처럼 뒹굴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곡에서 다시 15, 6리를 가니 소나무 사이로 큰 호수가 은은히 비친다. 허국선과 남시보가, ”이것이 경포(鏡浦)가 아닌지요?”라고 물었는데, 거짓으로 아니라고 말하였다. 수백 보를 걸어 소나무 숲을 막 벗어나자마자 밝은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수면은 막 닦아 놓은 거울 같았다. 산봉우리가 호수 굽이의 물가로 둘러쳐 있었는데, 그 둘레는 20여 리 나 되었다. 허국선과 남시보가 그제야

    “정말 경포로군요”라고 말하기에 내가 손뼉을 치면서 한바탕 웃었다.

    함께 말에서 내려 강문교(江門橋)를 산보했다. 조금 있자니 하늘에 남아있던 조각달이 소나무 사이를 헤집고 바다에 은은히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둠을 타고 강릉으로 가서 숙소를 잡았다.

    이날 바닷길 90여 리를 갔고, 물길 10여 리를 갔다.

    5월 10일, 을묘일

    부사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위문하고는 떠나는 것을 만류하였다.

    5월 11일, 병진일

    부사 김사문과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먼저 나가서 척번대(滌煩臺)를 구경했다. 척번대는 강릉객관(江陸客館)의 북쪽에 있었다. 잠시 후 허국선과 남시보가 경포를 향해 떠났고, 나도 뒤따라가서 함께 즐겼다. 두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다녀본 못이 한둘이 아니지만 숲 우거진 봉우리가 아름답게 주위를 두르고 석양 의 무지개다리로 사람이 지나가 그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것은 이 호수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일세. 하물며 곧바로 동쪽으로 바라보면 호수가 바다와 서로 이어져 그 사 이로 흰모래가 비단 펼쳐 놓은 듯함에 있어서야.” 라고 하였다.

    저녁 무렵 서북쪽으로 20여 리를 가서는 구산역(丘山驛)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