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좌(碑座), 비신(碑身), 개석(蓋石)를 갖추었으며, 비좌는 장방형으로 128cm×70cm×28cm이다. 비좌는 자연석을 바닥에 묻고 보이는 곳만 다듬었다. 비신은 64cm×24cm×157cm로 양면에 명문을 새긴 2면의 비석이다.
전면의 중앙에는 전서(篆書)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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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좌(碑座), 비신(碑身), 개석(蓋石)을 갖추었으며, 비좌는 장방형으로 125cm×90cm×33cm의 크기로 상면은 각 변의 모를 둥글게 죽여 자연스럽게 경사를 주었다. 비신은 75cm×25cm×190cm로 양면에 명문 을 새긴 2면의 비석이다. 전면 개석 바로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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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간 규모의 진영각(眞影閣) 안에는 환성당(喚惺堂)을 비롯하여 이 절 과 관련된 17분의 고승 영정이 일제 강점기까지 봉안되어 있었다고 기록 89)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연파당(蓮坡堂) 대사가“표충사선교양종도 총섭(表忠祠禪敎兩宗都摠攝)”을 지냈기 때문에 진영(眞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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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천(東川)과 청심대(淸心臺)
『명주사 사적기』에는 명소로 동천(東川)과 청심대 (淸心臺)가 나온다. 동천에는 운문암(雲門庵)과 문성 폭(聞聲瀑)의 명소가 있고 돌이 잠긴 물이 청주(淸酒) 처럼 맑아서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구경꾼이 아주 많다.
청심대(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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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이 양양의 검달동에 머물 때 명주사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증승(贈僧)”이란 시가 관동일록 에 실려 전한다.
이헌경(李獻慶)은 삼척부사를 지내면서 동해안을 유람하였으며, 허훈(許薰)은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다.『어성십경창화시』의 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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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천년고찰 명주사는 고려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기록이 거의 없어서 이 시기를 거론하 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창건 당시 창건주인 혜명 대사의 발자취를 추적해서 그의 신앙과 사고의 유연 성,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확인했다.
명주사가 위치한 어성전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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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교 교실별 수료자
교실명/강사/수료자
한시교실/이종우/12
사물놀이교실/신주명/18
서예교실(한문)/함연호/27
색소폰교실/이명재/27
서예교실(한글)/김광희/29
난타교실/주동진/10
한국화교실/조정승/20
민요교실/이건남/17
수채화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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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
수상
◈ 대한민국 운곡서예, 문인화대전
- 최우수상 : 김주희
- 삼 체 상 : 장영랑
- 특 선 : 이기순, 석경숙, 박상혁, 이주옥, 전선주, 전성호
◈ 양양문화제 휘호대회
- 대 상 : 김주희
- 우 수 상 :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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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허억봉’은 조선 후기에 퉁소와 대금 연주자로 당시 장악원(지금의 국립국악원) 총책임자인 전악까지 오른 천재 음악가로, 악인들이 악기를 연습할 수 있도록‘금합자보’라는 악보 제작에 참여하였다. 금합자보의 서문에는“허억봉은 대금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 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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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낙산사 관음송(觀音松) 이야기
2월 : 우리 생활과 함께한 소나무
3월 : 「양양팔경가」를 아시나요.
4월 : 3·1만세운동이후 계속된 양양의 청년운동
5월 : 교육에 대한 열정이 살아있는 내고장 양양
6월 : 양양향교 발전에 기여한 인물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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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늘 땔감과 건축재료로 애용하던 소나무의 명칭은 너무도 많다. 그중에서 관음송(觀 音松)이라는 이름은 낙산사와 연관이 깊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할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의 근기(根基)에 맞추어 32응신(應身)으로 모습 을 바꾸어 나타나기 때문에 관세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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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常綠喬木)이다. 우리나라 수종 중 가장 넓은 분포면적을 가지며 개체 수도 가장 많다. 소나무는 건조하거나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견디며 화강암 지대의 고 산에서도 잘 자란다. 건축재, 가구재, 생활용품, 관재(棺材), 선박 재료로 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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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는 잊혔지만 북한에서는 부르는, 양양사람은 안 부르지만 중국 조선족은 부르는 양양노 래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인민공화국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양양팔경가」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양양초급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최용대 교장이 작사하고, 음악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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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급격히 약해진 상황에서 조직된‘조선민족독립대동단’이 1919년 9월 조직을 재정비하며‘사회주의를 철저히 시행한다’는 노선을 내걸었던 것처럼 1920~1922년 무렵은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혼재되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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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교육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다. 교육이 국가와 사회 발전의 근본 초석이기 때문에 미래를 향한 긴 안목과 신중한 계획이 요구된다는 말일 것이다. 많은 국가들은 성립과 함께 제도화된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며 인재육성에 힘쓴다.
5월은 교육의 달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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