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 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쳐 오고 있 다. 우리나라 지명이나 산, 절 이름 등에 미륵(彌勒), 용화(龍華), 도솔(兜率)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彌勒殿)이 흔히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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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사를 1009년(고려 목종 12)에 창건한 후 속암(屬庵)으로 1123년(고려 인종 원년)에 청련암(靑蓮庵), 운문암(雲門庵)이 1676년(숙종 2)에는 절의 승려 수형(秀螢)에 의해 향로암(香爐庵)이, 1701년(숙종 27)에는 벽옥루(碧玉樓)가, 1781년(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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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께서 1928년『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을 작성하던 그 시점의 명주사는 속암들은 이미 폐허가 되어 없어진 것으로 확인이 된다.
1897년 이후 명주사가 원통암으로 이전하였는데도 그 주변의 전각을 합쳐 총 95간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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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명규모주요내용
합계
95
15개전각
독성각(獨聖閣)
1
스승 없이 혼자서 깨친 독각(獨覺)인 나반존자(那般尊者)를 봉안한 전각.
산신각(山神閣)
1
산신(山神)을 모신 전각.
어향각(御香閣)
9
왕실에서 하사한 재물 등으로 사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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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전각은 6.25이후의 건축으로 과거에 비하면 사세(寺勢)가 얼마나 기울었는지를 알 수 있다.
■ 금당(金堂)인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는 법당이다.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면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도 하며 아미타전(阿彌陀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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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관동지(關東誌)』,『관동읍지(關東邑誌)의 방리(坊里) 편에는 양양부에서 명주사까 지의 거리 50리, 편호 6, 승려 24구로 나타나는데 낙산사 승려가 28구로 별로 차이가 나질 않는 것으로 보 아서 매우 큰 절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된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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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의 변화
1) 비로자나불과 문수신앙
2) 명주사의 미타신앙
3) 원통암(圓通庵) 창건으로 인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
2. 명주사의 이건(移建)
3. 명주사의 속암(屬庵)
1) 원통암(圓通庵)
가. 명주사 원통암 상량문(明珠寺 圓通庵 上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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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로자나불과 문수신앙
2) 명주사의 미타신앙
3) 원통암(圓通庵) 창건으로 인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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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의 명주사사적기(明珠寺史蹟記)에 의하면 1009년 창건 당시에는 앞에서도 언급했 듯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화엄종풍(華嚴宗風)의 영향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셨다. 당 시는 오대산은 자장율사(590년~658년)에 의해서 문수 신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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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사는 창건 당시와는 달리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을 모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추사가 쓴 현판을 보면 이때 이미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西
方)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부처로 다른 말로 무량수불(無量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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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년 신축(辛丑)에 명주사 승려이 신 연파당(蓮坡堂) 대선사에 의해 원통 암(圓通庵)이 창건되어 관음상(觀音像) 을 조성, 봉안하였다. 이로 인하여 관음 신앙이 미타신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졌을 것이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은 '자신을 부 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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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명주사지(明珠寺址)는 현 사찰에 서 도로를 이용해 1.3km 정도 내려오 면 ”천년고찰 명주사 옛터“라는 간판이 보인다. 근처에 있었던 중봉당선사탑 (中峯堂禪師塔)도 옮겨가서 아무것도 없다.
1897년 화재로 소실되고 나서는 현 사찰인 원통암(圓通庵)으로 옮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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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통암(圓通庵)
가. 명주사 원통암 상량문(明珠寺 圓通庵 上樑文)
나. 원통암중건기(圓通庵重建記)
다. 원통암의 사액(賜額)과 명주사가 어향각(御香閣)을 지은 사유
2) 청련암(靑蓮庵)과 운문암(雲門庵)
3) 향로암(香爐庵)
4) 벽옥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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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년(정종 5년, 辛丑)에 연파(蓮坡) 대선사가 원통암(圓通庵)을 창건하고 관음상(觀音像)을 조성, 봉안하 였다. 1849년(헌종 15년)에 원통암(圓通庵)이 소실되어 곧바로 중건하고, 1853년(철종 4년)에도 원통암(圓 通庵)이 소실되어 중건하였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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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암 상량문은 학운의 고족제자인 용악보위스님이 1864년에 직접 지은 것으로 번역문을 살펴보면 아래
와 같다.
자비심으로 익사자를 구원함은 부처 의 가르침이 바다처럼 넓고 깊은 까닭 이다. 원통암을 훌륭하게 완성하고 편 액을 높이 달아 준공을 알리는 것은 불 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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