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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문화36호

    2) 명주사의 미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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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명주사는 창건 당시와는 달리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을 모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추사가 쓴 현판을 보면 이때 이미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西

    方)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부처로 다른 말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미타사, 미타암 등 사찰 이름에 많이 쓰인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완당(阮堂)이라고“완(阮)”자(字)가 들어가는 호(號)를 쓴 것은 1809년 과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연경(燕京)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된 후부 터46) 사용하다가 제주 유배에서 풀린 1848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원통암이 1849년과 1853년에 거듭 소실(燒失)로 복원되는데 1849년은 추사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1년 뒤이며, 1853년은 북청(北靑) 유배에서 풀려난 시기로 여러 가지 정황상 1853년이 유력해 보인다.

    그러나 글씨체로는 대흥사 현판과 같이 힘이 넘쳐서 대흥사 현판과 비슷한 시기인 1840년 이전에 방문하 여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1980년 이후 추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은 신흥사 유물전시관(遺 物展示館)에 보관 중이다.

    추사가 쓴 명주사 현판은 예서체(隸書體)로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쓰고 약완(若阮)이라는 낙관을 찍 었다.

    전남  해남의  두륜산(頭崙山) 대흥사 (大興寺) 현판과 거의 흡사하고 글씨체 는 같으나 대흥사는 호를 노완(老阮)이 라 쓰고 낙관을 찍지 않았다.

    추사고택47) 근처의 야산인 오석산(烏 石山)에는 백제 때 창건된 화암사(華巖 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을 추사의 증 조부가 재건하여 추사 가문의 집안 절 로 사용하였다. 추사가 쓴 이 무량수각 현판은 바로 화암사에도 걸려 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流配) 생활 을 하고 있을 때 절을 다시 한 차례 중 수하였는데 추사는 이 현판 글씨를 제 주도에서 써 보냈다.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비록 귀양을 가는 길(1840년)이지만 권문세 가의  핵심  인물로서  아직  기고만장할 때 쓴 글씨이고,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 판은 유배 생활의 고초를 겪으면서 기(氣)가 한풀 꺾이고 고독 속에서 삶을 반추하던 시기에 쓴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암사 무량수각 현 판은 글씨가 매우 담담하다. 필획에 어떤 힘을 넣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의도하는 바가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담(淡)'의 글씨라고 할 수 있고, 한바탕 병을 앓고 난 후에 쓴 해쓱한 글씨라고 할 수 있다.48)




    028-1.jpg

    〈그림 10〉위는 한껏 멋을 부린 대흥사 현판,

    아래는 기름기를 제거한 화암사 현판


     

    028-2.jpg

    〈그림 11〉명주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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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유홍준 저,『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김정희』

    47)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국리 261번지, 충남 지정 유형문화재 43호 

    48) 2011년 김병기의 서예·한문이야기(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