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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문화36호

    Ⅵ. 맺은 말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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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지금까지 살펴본 천년고찰 명주사는 고려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기록이 거의 없어서 이 시기를 거론하 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창건 당시 창건주인 혜명 대사의 발자취를 추적해서 그의 신앙과 사고의 유연 성,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확인했다.

    명주사가 위치한 어성전리의 자연환경(어성십경)을 고찰하고“어성산수록(漁城山水錄)”을 통해 사찰과의 관 계를 엿보았으며,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도 탐낼만한 경치임을 알아보았다.

    1009년 창건 당시는 비로자나불을 모셨음을 확인했고 지금 명주사가 위치한 만월산이 오대산 기슭으로 당시 오대산의 문수 신앙과 유관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신라말부터 고려, 조선으로 이어온 화엄 종풍(宗風)과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서 보살의 상주처를 확인하면서 다시 신앙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화엄경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專制) 왕권 국가의 율령정치 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큰 구실을 담당하였고, 교단 통합은 왕권 강화와 사회안정으로 연결되었고 미륵신앙은 민간으로만 명맥이 유지 됨을 알았다.

    명주사는 비로자나불과 문수 신앙에서 미타(彌陀) 신앙과 관음신앙으로 옮겨졌음을 확인하였으며, 미타신 앙의 증거인 추사의“무량수각(無量壽閣)”현판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명주사의 연혁(沿革)을 살펴보면서 수 없는 화마에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 끝내는 이건 할 수밖에는 없는 안타까운 역사를 보았고, 그 가운데 속암들이 모두 사라져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을 마 주하였다.

    1928년 한용운 스님이 작성한『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에 의하면 명주사는 15개 전각에 95간의 큰 절이었 으며, 당시 낙산사가 108간이니 견줄만 하였다는 사실도 알았다. 특히 학승(學僧)이 찾는 강원으로 운영되었 기에 원통암을 30간으로 중창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6.25로 급작스럽게 몰락하였으며 1963년에야 수룡(壽龍) 스님에 의해 복원이 되어 현재로 이어짐도 알았다.

    1897년 명주사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의 속암(屬庵)이었던 원통암에서 업무를 보다가 1906년 암자를 확장하고 중건하면서 명주사의 지위를 온전하게 갖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명주사 사적기를 처음으로 모두 번역하면서 1864년 원통암 상량문을 통해 원통암이 사액(賜額)된 곳임을 처음으로 알았고, 이런 사유로 원 통암을 중시하였으며, 명주사에 어향각(御香閣)이 지어졌음을 알았다.

    명주사의 성보(聖寶)인 동종이 1704년 울진 대흥사명 범종임을 주종기(鑄鐘記)와 몇 편의 논문을 통해서 확인하였으며, 대시주 정충득(鄭忠淂)에 의해 1906년에 이안(移安)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부도(浮屠) 12기와 석비(石碑) 4기, 도난(盜難) 부도 2기에 대하여도 세심하게 살펴보고 도난 부도 중 성월 당 부도는 치아사리(齒牙舍利)가 내장(內藏)되어 있어 탑호(塔號)가 성월당치아사리탑(晟月堂齒牙舍利塔)107) 이었음을 확인했다. 특히 비문 4기를 모두를 번역하였으며, 처음으로 실측하여 연파당의 부도와 함께 본고 (本稿)에 실었다.

    연파당 대선사(1730년~1817년)는 승직 가운데 최고위직인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表忠祠禪敎兩宗都摠攝) 과 석왕사도원장(釋王寺都院長)을 역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유일하게 비문과 부도가 함께 전한다. 인곡당 선사(1734년~1816년)는 서산대사의 정통 법맥을 이었으며, 오대산에서 군친자4의 수복을 기원하는 100일 재를 올렸다. 학운당 태선사(1793년~1869년)는 원통암이 소실되자 3번이나 중건하였으며 상감께 법의 규 정으로 넉넉히 구휼(救恤) 받을 수 있도록 주청(奏請)하여 중창을 완료하였다. 용악당 대선사(1817~1883)는 학운의 제자로 몽암 선사로부터 선·교양종의 선지를 전해 받아 서산대사의 적파 자손 환성지안의 7대손이 다. 유·불의 경전을 들락거렸다. 용악당 대선사의 남겨진 작품으로는 1862년“원통암 현판”과 1864년“원 통암 상량문”, 1872년“학운당 태선사 정원 영세불망비”, 1875년“통도사 백련정사 만일승회기”가 전한다. 특히, 현재 전해오는 원통암 현판이 용악당의 작품임을 본고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명주사는 주변에 이름난 명소가 많았으며 특히 절 뒤에 상룡격(上龍格)인 문필봉(文筆峰)이 있어 스님들도 문사에 능했다고 한다.

    전하는 시문에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시문과 1722년(경종 2)부터 1724년(영조 원년) 11월까지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지낸 채팽윤(蔡彭胤)의 명주암(明珠庵) 벽옥루(碧玉樓)가 전하며, 삼척부사(三陟府使) 이헌 경,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허훈 등의 작품에서 명주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본고(本稿)를 정리하면서 현존하는 부도 12기 중 생애(生涯)를 알 수 있는 부도는 연파당의 부도 1기 뿐 이 었다. 고승들의 기록과 진영(眞影)이 1928년 이후 진영각과 함께 소실되어 기록에서 사라졌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래도 밀양의 표충사에 연파당 대선사의 진영이 남아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2010년부터 주지 소임을 맡은 적광(寂光) 지혜(智慧) 스님께서 2017년 포대화상(布袋和尙)을 이안(移安) 하여 모셨고, 2021년에는 요사 중창과 일주문을 건립하고, 극락전 외부의 벽화를 그리고 주련을 다는 등 불 사에 힘쓰고 있어 옛 명성을 되찾기를 기대한다. 모쪼록 본고(本稿)가 명주사의 역사와 위상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자료로써 활용이 되고 명주사 역사 발굴에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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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명주사의 탑 166쪽에 탑호가 명기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