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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36호

    4월 : 3·1만세운동이후 계속된 양양의 청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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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급격히 약해진 상황에서 조직된‘조선민족독립대동단’이 1919년  9월  조직을  재정비하며‘사회주의를  철저히  시행한다’는  노선을  내걸었던  것처럼 1920~1922년 무렵은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혼재되어 일어나던 시기 였다.

    그때 양양의 3·1 만세운동 주력이었던 청년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을까?

    당시 신문 기사를 찾아본다.

    1921년 3월 예배당(현재 양양감리교회)에서 창립된 양양엡워스청년회는 전도 사업, 유학 지원, 토론 및 강연회 개최 등 주요 사업을 추구하였다. 이 청년회가 강릉 관동학우회의 순회강연을 지원 하였으나 허가 없이 금품을 모집했다 하여 일제로부터 벌금을 처분받는 등 집요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엡워스청년회(Epworth League)는 미국 감리교파(Methodist) 청년단체로 구한말에 서재필과 윤치호 등이 주도했으며 백범 김구도 진남포 엡워스청년회 출신이다.

    <동아일보 1923.9.1.> 1922년 경성 유학생이 강현면 물치리에 호산(湖山)기독청년회를 조직하면서 노동야학 및 풍속개량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이듬해 물치노농동맹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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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일보 1925.1.22.(양양신청년 동맹창립)



    양양지역 청년운동의 분기점은 1925년에 창립한 양양신청년동맹(신청)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동 맹의 집행위원 대부분은 사회주의계였으며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소작운동, 노 동연합 등을 논의하고 실천하였다.

    1925년 11월 9일에 만해 한용운(韓龍雲)은‘인생관’이란 제목의 강연회를, 21일에 송봉우는 동아일보 양양지국의 후원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양양청년회를 통합한 동화청년회가 1927년 3월 전양양사회운동단체연합간친회(全襄陽社會運動團體聯合墾 親會)를 주최하여 참가인원 80여 명과 함께 양양의 사회운동 전반에 대하여 논의,결의하였으며 그해에 양양신 청년동맹은 양양청년연맹으로, 다시 양양청년동맹(양청동맹)으로 발전적인 해체와 재조직을 거듭했고 각 면의 청년단체는 양청동맹 지부로 전환하였다. 당시 9개 면에 8개 지부가 설치되고 지부의 총회원은 300명 정도였 으며 양청동맹은 신간회양양지회, 양양농민조합, 어민조합 및 소년연맹 창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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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외일보 1927.11.27.(양양신간 설립대회 성황)



    비타협 민족주의계와 성장한 사회주의계가 연합하여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는 민족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인 조직을 구축하였는데 그해 11월 양양신간회지회가 설립되었다.

    100여 년 전 양양지역 청년들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 하면서 사회 변혁 주 체로서 노력한 모습이 엿보인다.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 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모든 사람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야 한다”는『아리랑』의 작 가 조정래의 말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