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 교육에 대한 열정이 살아있는 내고장 양양
페이지 정보
본문
옛날부터 교육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다. 교육이 국가와 사회 발전의 근본 초석이기 때문에 미래를 향한 긴 안목과 신중한 계획이 요구된다는 말일 것이다. 많은 국가들은 성립과 함께 제도화된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며 인재육성에 힘쓴다.
5월은 교육의 달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보여준 우리 군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참여를 한 번 돌아보고자 한다.
우리 지역은 기록상 향교가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고려 1260년 이전에 이미 설립되었으나 강릉도존무사 안축에 의해 재건된 향교는 조선 숙종 8년(1682년)에 부사 최상익이 확장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官)에서 주도하여 세운 향교이지만 건립과정에서 양양지방의 향로(鄕老)들 이 적극 의견을 내고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 인조 6년(1628)에 양양도호부사 조위한이 흥학에 뜻을 두고 방법을 강구하던 중 장차 헐리게 될 양양부 대포만호영의 군용 건물을 학사로 전용하도록하면서 동명서원이 창건되었다. 서원 운영에 국가의 지원이 있었으나 사학인 만큼 지역 유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으로 운영되었다.
서민들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서당은 서문리의 건계서당, 조산리의 몽산서당, 송전리의 한동서당 이외에도 마을마다 여러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양양지방의 인재들이 과거시험에 다수 합격한 사료는 기초교육이 되는 서당 교육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지역민들의 교육에 대한 참여도는 어떠했 는지 잘 보여준다.
건계서숙 녹천당계첩(1691년)과 한동서당 교사 임명장(1914년)
3.1운동 이후에는 대다수의 마을에 신 학서당을 설치하여 각 리마다 야간학교 를 개설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서당 에 모여 배움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신학서당은 근대적 초등교육을 실시하여 국민교육과 문맹퇴치 그리고 민족의식 앙양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6년 남궁억 선생의 주도로 설립된 현산학교가 있다.
학교 건립 비용을 조성하기 위해 양양인사들이 앞다투어 엽전 3만 량을 출연 기부하였다. 당시 황성신문은 양양의 인사들과 군민들이 보여준 적극적 인 참여와 후원, 신학문에 대한 뜨거운 교육열을 여러 차례 기사화하여 전국이 이를 본받기를 장려하였다.
일제 강점기 식민주의 교육과 해방 이후 북한 치 하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기도 했으나 6.25 전란 이후 1953년 양양이 수복 지구로 행정이 이양되면서 손실, 파괴되었던 각급 학 교를 재건하고 면학에 정 진하게 되었다.
정부의 교육정책에 따 라 양양의 교육기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여준 교육에 대한 지자체의 노력과 군민들의 호응은 늘 한결같았 다. 우리 아이들의 질 좋은 교육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며 현재 고등학교 1개, 중학교 4개, 초등학교 16 개와 사립 교육 기관들을 지원하고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은 신이 보내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고, 그 선물을 잘 키워내기 위해선 사회 전체의 전폭 적인 도움과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과 실천을 통해 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자라는 소리가 양양에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옛 현산학교(군행리)
1906년 9월 8일 사립 현산학교 개학관련 기사 (1906년 9월 26일자 황성신문)
-
- 이전글
- 4월 : 3·1만세운동이후 계속된 양양의 청년운동
- 25.01.22
-
- 다음글
- 6월 : 양양향교 발전에 기여한 인물
- 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