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 양양향교 발전에 기여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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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공교육은 지금부터 약 800년 전인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인종(仁宗) 5년 (1127) 3월, 전국의 모든 주(州)에 학교를 세우라는 입학조서【立學詔書:『고려사』세가 권74】에 근거 하여 양양향교가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양양이 양주방어사로 승격된 1221년에서 지양주사로 승격 된 1260년경 사이로 추정된다.
양양향교는 고려 충숙왕 17년(1330) 구교리에 재건하였다가 조선 숙종 8년(1682)에 구교리에서 현재의 위치인 임천리로 이전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재건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양양에서도 조선시대에 유학이 번성하였는데 당시 지역 유학의 요람인 양 양향교의 발전을 위해 공로가 큰 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양양향교에는 오래된 비석 4기가 있는데 유학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양양 부사 조종저(趙宗著), 안 경운(安慶運), 임희교(任希敎)의 흥학비(興學碑)와 군수 이구영(李龜榮) 거사비(去思碑)이다.
향교입구 전경
○ 조종저(趙宗著) 부사 :“재직 중 교육에 치중하고 교풍을 진흥시켜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 여 과거에서 우등으로 합격한 사람이 계속 끊이지 않았다”는 현산지 명환조(峴山誌 名宦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趙公宗著留心學校興起士風自後文敎漸振科甲連綿/조공종저유심학 교흥기사풍자후문교점진과갑연면】본관은 한양(漢陽), 현종 1년(1660)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명 을 날렸으며, 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숙종 원년(1675) 8월 2일 양양부사로 부임, 숙종 2년(1676) 11월 16일 홍문관 수찬으로 제수받고 이임하였다. 흥학비와 더불어 선정비도 세워졌으며, 관직은 사헌부 집 의에 이르렀다. 역사에 밝았고, 천문·역수·의약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남악집』·『간재신사』등이 있 다.
○ 안경운(安慶運) 부사 : 재임 중 학문을 장려하고 향교재산을 증식시켰다. 또한 영조 23년(1747) 사림사(선림 원) 홍각선사비가 산불로 훼손된 것을 관아 창고에 보관하였는데, 이 비는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영조 1년(1725)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1743년 병조참의를 역임한 후 영조 20년(1744) 12월 2 일 양양 부사로 부임하여 3년간 봉직한 후에 병조참의로 제수받고 이임하였다. 본관은 순흥으로 선조(先祖) 인 강릉도존무사를 역임한 안축선생의 시문집인『근재집』을 펴냈다.
○ 임희교(任希敎) 부사 : 재직 중 학문과 인재 양성에 전력하였다. 본관은 풍천(豊川), 영조 26년(1750) 알성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영조 31년(1755) 7월 17일 사헌부 장령에서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영조 33년 (1757) 사헌부 집의를 제수받고 이임하였으며 관직이 병조참판과 대사헌에 이르렀다.
○ 이구영(李龜榮)군수 : 재직 중 양양향교와 동해신묘를 중수하였다. 법도에 맞게 민간의 관심사를 현장에서 살펴 존경받았다. 춘천 출신으로 고종 20년(1883) 유학으로 벼슬에 진출, 고종 37년(1900)에 양양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고종 38년(1901) 이임한 후 종2품에 올랐다.
비문이 한문인데다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려워 관람객을 위한 안내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헌을 종 합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양양향교의 흥학비와 거사비 : 조선시대에 양양 부사와 군수로 재직한 분 중에 학문을 장려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향교 재산을 증식하거나 건물을 중수하는 등 공적을 세운 이들을 기려 양양주민이 세운 비석이다.」
양양부사·군수 흥학비·거사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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