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양양문화36호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문화36호

    6. 명주사의 명소(名所)

    페이지 정보

    조회 32회

    본문

    1) 동천(東川)과 청심대(淸心臺)


    『명주사 사적기』에는 명소로 동천(東川)과 청심대 (淸心臺)가 나온다. 동천에는 운문암(雲門庵)과 문성 폭(聞聲瀑)의 명소가 있고 돌이 잠긴 물이 청주(淸酒) 처럼 맑아서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구경꾼이 아주 많다.

    청심대(淸心臺)는 아득하게 솟아 산수 경치가 아름 다워서 조망(眺望)하면 더없이 훌륭하고 좋다.

    1910년대 초반에 발간된『현산지(峴山誌)』형승(形勝)에는 운문암(雲門巖)은 부 남쪽 60리 명주사 남쪽 동수(洞水)에 있는데 돌이 지극히 아름답다. 현수(峴●) 이휘진(李彙晉)이‘운문암’이라 명명하고, 운문암 이름 석자〔三字〕는 이형익(李衡翼)의 글씨로 크게 새겨져 있다.91)청심대(淸心臺)는 부 남쪽 40리 명주사의 북대(北臺)에 있다. 그 기세가 가파르고 높아 골짜기에 임 해 누워있는데, 그 높이가 수백 척이다. 현수 이휘진이‘청심(淸心)’이라 명하였다. 이곳에는 작자 미상의 시 (詩)의 기록(記)이 있는데, 시에 이르기를“암자(庵子)의 스님은 내가 오지 않음을 응당 괴이하게 여기리, 송 원(松院)에서 송이가 피면 만나자는 기약을 한다며, 이 몸으론 한 해도 마치기 어려울 듯, 거기에 비바람 열 흘이나 불어댄다. 찬 바람이는 계곡 숲에서 처음 술에서 깨어나니, 옛 달 뜬 산루(山樓)는 시 읽을 만하다. 절 아래 청심대(淸心臺)는 백 척이나 되고, 가마에서 잠시 내려 지팡이에 의지해 거닐어본다”하였다.92)

     

     

    054-1.jpg

    〈그림 26〉운문암 전경



    2) 검달동(黔達洞)과 매월당(梅月堂)


    『현산지(峴山誌)』고적(古跡)조에 검달동(黔達洞)은 부 남쪽 80리에 있는데, 중첩한 봉우리에 둘러 쌓여 인적이 드물다. 이곳은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복 거처(卜居處) 유지(遺址)이다. 일찌기 세속에 전하기 를, 오세동자(五世童子)의 터라 이른다. 시에 말하길 “집을 옮기니 각종 영지(靈芝)가 있네, 그곳을 알 수 없네.”93)하였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매월당(梅月堂), 법호(法號)는 설잠(雪岑)이다. 한양의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3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5세때 이미 글을 지어 신동이 되었다. 세종대왕으로부터 오세(五歲)라는 별호를 받았다.

    1455년 21세 되던 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몰아내자 3일간 통곡하고 공부하던 책을 모 두 불사른 뒤 승려가 되어 유랑하였다. 이때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으로 옮겨 노량 진에 임시 매장한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다. 저서에는 만포사저포기, 금오신화, 유금오록 등이 있다.

    47세(성종 12년 1481년)에 안씨(安氏) 아내를 맞아 환속(還俗)하였으나 폐비 윤씨 사건(1479년)으로 다시 승려가 되어 관동지방을 찾았으며 당시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으로 법수치리 검달곡(黔達谷)과 설 악산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아 쓴 100여 편의 시가 관동일록(關東日錄)과 유관동록(遊關東錄)에 전한다.94)

    관동일록은 춘천을 거쳐서 강릉과 양양을 찾은 노정에 따라 시들이 엮여져 있다. 춘천에 도착한 다음 해에 는 강릉에 있었다. 강릉과 양양에서 두 해 가량 머물렀던 듯하다.95)

    아래의 시(詩)는 매월당이 머물던 검달동 옆에 대승폭포(大僧瀑布)가 있는데 이곳에 비가 오면 물이 불어 서 폭포수가 5m 이상 날아가 떨어지는 현상이 있다. 아마도 매월당이 이곳을 지나며 쓴 것으로 보이는“문 전비폭(門前飛瀑)”이란 시가 유관동록(遊關東錄)에 전하여 소개해 본다.


    ■ 門前飛瀑(문 앞까지 날아 떨어지는 폭포)

    一道寒泉落遠峯       한줄기 찬 샘이 먼 봉우리에서 떨어지니

    對門常噴玉玲瓏       문을 마주하고 언제나 옥빛을 뿜어 영롱하다.

    龍駕不回雲寂寞       용가(御駕)가 돌아오지 않아 구름이 적막한데

    水聲牽恨和踈鐘       억울함을 끄는 물소리는 먼 곳의 종소리와 어우러진다.

     

    054-2.jpg

    (그림 27) 검달동 전경



    3) 문필봉(文筆峰)의 전설


    만월산 명주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스님들이 참선하고 공부하는 강원(講院)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 니 누구든 빨리 깨치기 위해서는 많은 속설이 있었을 것이다.

    만월산은 해발고도 628.1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명주사에서 하행(下行)을 하다가 부도탑 앞을 조 금 지난 언덕에서 만월산을 바라보면 산 끝이 붓끝 또는 죽순처럼 뾰족하게 보이는데 이를 풍수에서는 문필 사(文筆砂)라하여 상룡격(上龍格)이면 문장이 출중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귀와 명예가 널리 알려진다고 하여 우리 조상들은 숭상하였다. 이 절에서 공부하는 승려들이 그곳에 올라가 기도하면 도를 깨친다는 전설이 전 하고 있으며 명주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고시 공부의 요람으로 합격자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성전에도 국회의원을 비롯한 출세한 인물들이 있었다.

    절의 규모에 비하여 부도탑(僧塔)이 많은 것도 문필봉(文筆峰)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96)


    ---------------------

    58.jpg

    94) 襄陽 地域의 傳統寺刹 2022년 12월 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66쪽 

    95)「매월당의 관동유력고」(최승순,『강원문화연구』제11집, 1992)

    96) 襄陽 地域의 傳統寺刹 2022년 12월 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