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령은 소동라령의 기능이 미시파령(미시령)으로 옮겨간 후에도 과객(科客)이나 양반, 관료들이 다니는 공로(公路)의 기능을 일부 하였다면 필례령은 보부상이나 “바 꾸미(物物交換)”하던 일반인이 넘어 다니는 지름길(捷徑) 이었다.
부보상(負褓商)은 보상(褓商)과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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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례령은 한양 500리의 오색령과는 달리 동해안에서 만들어진 소금이 내륙인 영서 로 전해지던 대표적인 “소금길”이자 지름길이었다. 양양에서 구운 소금, 말린 생선 등 이 봇짐으로, 혹은 나귀와 소의 등에 실려 필례령을 넘어가 인제에서 곡식, 나물, 버 섯 등으로 교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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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위치 및 식생
Ⅱ. 영 이름의 변화와 고문헌 속 단목령
Ⅲ. 단목령의 이용실태
Ⅳ. 단목령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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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령은 서면 오색 1리 오색분교 앞에서 인제군 기린면(麒麟面) 진동리 설피밭까 지 연결하는 북암령과 점봉산 사이의 안부(鞍部)52)를 지나는 고개(嶺路)이다. 예전에 는 연수파(連水波), 박달령(朴達嶺)이라 불리었는데 현대 지도에는 단목령(檀木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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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령(檀木嶺)은 동국지도(1724∼1776) 강원도 편에서 연수파(連水坡)로 기록된 후 대부분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다만, 팔도지도(1778∼1838)에서는 고개 파(坡)가 물 결 파(波)로 변하여 연수파(連水波)로 표기하였다.
광여도(1737∼1776)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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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령은 오늘날까지 이용되는 영로(嶺路)이기는 하지만 생계 수단의 대표적 영로 였기 때문에 공로(公路) 개념과는 거리가 있어 양반이나 문장가가 다니지 않아서 시 문(詩文)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양양부에서의 거리와 방향만 표기한 글이 보이 며 기린과의 경계였음을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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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이전
2. 조선시대
3. 근대(近代)의 피난(避難) 길 단목령
4.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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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접한 양양군과 인제군의 군민이 자급자족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그 지역에서 생 산되지 않은 양양의 소금⋅해산물 그리고 춘천계 기린현⋅인제현의 곡물을 바꾸미 (物物交換)로 교환하기 위하여 연수파(박달령)의 길을 주로 이용한 것으로 추측한다.
단목령은 길이와 높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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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正祖)대에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금난전권(禁亂廛權)58)이 폐지되면서 장시(場市)가 개설되어 보부상(褓負商)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장 시에서 지역 특산품을 매입하여 생산되지 않은 지역으로 옮겨주고 품값을 받거나 판 매하기도 하면서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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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동학농민운동
1860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장남 세정(世貞)은 영월, 양양, 인제 등지로 피신 하여 생활하면서 그 지역의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동학에 대한 관가(官家)의 탄압이 심해지자 양양 김덕중(金德中)의 집에 피신해 있던 세정은 1870년 10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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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선질꾼은 존재했다. 6. 25 이후에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하여 단목령을 넘었는데 그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 김충현(여 1929년생)
한국전쟁으로 남편은 인민군에 끌려가 생사를 모른 채 돌아오지 않았고 전쟁 통에 집은 불타버려 매우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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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령에서 바꾸미들의 왕래(往來)는 1970년대 초반까지 행하여졌으며 그 이후에는 나물을 채취하고 말려서 내려오는 길로 이용되다가 1982년에 「설악산 생물권보전지역 」으로 지정되면서 1987년부터 입산이 통제되어 단목령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 하는 사람만이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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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소동라령(所冬羅嶺)의 위치와 의미
Ⅲ. 현재 지명과 비교 및 실사
Ⅳ. 오색역과 소동라령의 관계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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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라령(현 북암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양양도호부편에서 “요해(要害)는 본부(府) 서쪽으로부터 인제 경계 바드라재[所等羅嶺]로 가는데 36리이 다.65)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편에는 “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치고 포개진 산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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