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인마(人馬)만 다니던 오색령이 일제말기에야 우마차가 겨우 갈 수 있 는 도로였다. 반면에 백두대간 중 최고 낮은 529m의 진부령(陳富嶺)27)이 1938년 『조 선도로령』에 의거하여 65호선 국도가 되면서 영북지역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단선 국도로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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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를 전후하여 소동라령(所冬羅嶺)이 도로의 기능을 상실하자, 오색령은 새 로 개척한 영로로 분명히 소동라령과는 별개의 지명이다. 여지도(輿地圖, 1736∼1767) 등에는 오색령과 소동라령은 전혀 다른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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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지금의 한계령은 양양의 오색령이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색 령(五色嶺)이 우리 지역의 고유한 지명이라는 당위성을 내 새워 복원해야 한다고 강 력한 주장을 피력(披瀝)해왔다.
지난 2010년에 양양군지(襄陽郡誌)를 발간하기 위해 군지발간위원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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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필여령(弼如嶺)에 관한 고찰(考察)
Ⅲ. 필여령(弼如嶺)의 유래와 변화
Ⅳ. 필여령(弼如嶺)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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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여령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와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를 잇는 영로(嶺路) 이다. 양양군 서면 오색리 44번 국도 오색령 정상 근처인 필례령 입구에서 접속하는 왕복 2차로이다.
필여령(弼如嶺) 북쪽에는 소솔령(所率嶺)이 있었는데 소솔령은 오색령(五色嶺)의 옛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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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문헌 속 필여령
2. 고문서에 나타나는 양양 지역 영(嶺)의 순서(順序)
3. 현대지도에 표기한 영(嶺)의 순서
4. 필여령 접근로의 변화(상행선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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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중에 필여령(弼如嶺)에 대하여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서인 『여지도서(輿地 圖書)』와 『양양부읍지(襄陽府邑誌)』는 거의 동시대인 18세기 중반의 기록으로 내용도 비슷하다.
이중 여지도서가 좀 더 세밀하여 “형제현(兄弟峴)” 고개를 거쳐야 필여령과 오색령에 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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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고지도와 문서에 표기된 지도 명칭과 순서
제작 연도
지도명
한계령(寒溪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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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대정6)에 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를 보면 양양군청에서 필례(必禮)령과 오 색령까지 접근하는 길이 현재와는 사뭇 다르다. 특히 1915년(대정4)에 측도(測圖)하고 1917년에 제작을 완료하였으니 1915년 현재를 표기한 지도를 보면 아래와 같다.
∎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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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여령의 유래와 지명의 변화
2.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피래(避來)
3. 필례약수(必曳藥水)와 온천(溫泉)
4. 태백산맥과 은비령의 무대
5. 보부상(褓負商)의 바꾸미[物物交換]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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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여령(弼如嶺)은 본래 필례령이었으나 '례'를 이두(吏讀)로 문자화(文字化)하는 과 정에서 '여(如)' 또는 '노(奴)'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필노령(弼奴嶺)은 노력을 아끼는 고갯길로 “지름길”이란 뜻이 있는데 오색령에 비하 면 필여령이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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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례 계곡을 중심으로 내린천로 방향을 따라가면 대부분 지명이 군사용어 같다. 앞 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난리(亂離)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피래(避來)” “필예(必 曳)”는 은둔(隱遁)의 계곡(溪谷)에서 재기를 꿈꾸는 범상치 않은 곳임을 의미한다. 한 계산성(寒溪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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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례약수도 역시 “필예” 또는 “피래” 약수로 불리는데 점봉산 서쪽인 인제군 인제읍 귀둔리 1053-1번지로 44번 국도 필례령 입구에서 6km 지점에 있다.
『인제군지』는 1930년경 김씨 성을 가진 이가 발견한 약수라고 하지만 약수의 역사 는 그보다 더 오래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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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례로가 포장될 즈음에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한 조정래 원작 『태백산맥』이 1994 년 9월 17일 개봉되었다. 필례 계곡이 영화 태백산맥의 전투 장면을 촬영했던 장소로 알려지면서 명소가 되었다.
또한 이순원46)이 1996년 발표한 소설로 ‘우주의 시간과 별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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