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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지방의 영(嶺)

    1. 영 이름의 변화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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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단목령(檀木嶺)은 동국지도(1724∼1776) 강원도 편에서 연수파(連水坡)로 기록된 후 대부분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다만, 팔도지도(1778∼1838)에서는 고개 파(坡)가 물 결 파(波)로 변하여 연수파(連水波)로 표기하였다.

    광여도(1737∼1776)와 『대동지지(1861∼1866)』에서는  박달령(朴達嶺)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수령(連水嶺)으로 표기한 지도로는 여지도(1777∼1778), 좌해지도(1776~1800), 좌해여도(1838), 청구도(1834)이다. 청구요람(1863~1907년)에는 원수령(遠水嶺)으로 표 기되어 연(連)자를 옮기는 가운데 실수로 원(遠)이 되지 않았나 짐작한다.

    그런데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을 잇는 해발 826m의 고개인 미시파령(彌時坡 嶺) 즉 미시령(彌矢嶺)이 연수파(連水坡)와 비슷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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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검재집』권20 「유풍악기」의 연수파



    ∎ 미시파령(彌時坡嶺)의 이칭(異稱)


    ― 김유(金楺,1653~1719)는 『검재집(儉齋集)』 권20 「유풍악기(游楓嶽記)」에서 “고 개를 미시(彌時) 혹은 미일(彌日)이라고 칭하고 속세에서는 연수파(烟樹坡 : 연기가  많고  나무가  많은  고개)라  부른다.”(嶺卽名彌時而或稱彌日俗號烟樹坡)고 했다. 

    ―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 산수(山水) 편에서 연수령(延壽嶺)이란  표현을 썼다. 

    ―  김정호(1804~1866)는 「대동여지도」와 『여도비지(輿圖備志,  1851∼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6)』에서  연수파령(連水坡岺)으로  표기하였는데  연수파령(連 水坡岺)을 동방문화대학원 권상호교수는 “물길이 이어지는 고개”로 풀이 하였다.


    미시령의 이칭 중에서 연수파와 한자로 가장 가까운 것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인데 단목령은 세 글자인 연수파(連水坡)로 표기한 반면, 대동여지도에서는 네 글자인 연수파령(連水坡嶺)으로 썼다. 고개를 뜻하는 글자인 파(坡)와 영(嶺)을 한꺼번에 쓴 것은 특이하다.

    영(嶺)의 이름 중 박달령이라는 이름은 전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으로 연수파(連水 坡)  인근에는  박달나무  군락이  많은데다가  영  정상에서 인제  방면의  사면에  박달산 (朴達山)이 있어 박달령으로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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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광여도와 조선오만분일지형도

     


    또한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측도(測圖)하고 1918년에 발행한 지도에 는 박달령(朴達嶺)을 단목령(檀木嶺)으로 바꾸어 기록하였는데 그 후부터 현재까지 단 목령이 공식적인 표기가 되었다. 

    박달령(朴達嶺)이 박달나무55)에서  유래하였으므로 박달나무를 뜻하는 단목(檀木)을 써서 단목령(檀木嶺)이라 바뀐 것은 일제(日帝)에 의하여 창지(創地) 개명(改名)을 당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인지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지금도 박달령이라고 계 속하여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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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박달나무는 참나무목 자작나무과의 교목(喬木)으로 20~30미터쯤 자라며 온대 북부 지방의 깊은 산에서 자란다. 겨 울에 잎이 지는 넓은 잎 큰키나무이다. 박달나무는 매우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여 다듬이방망이, 홍두깨, 방아와 절구공이, 떡살과 다식판, 머리빗 등 일상 용품을 만드는 유용한 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