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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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正祖)대에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금난전권(禁亂廛權)58)이 폐지되면서 장시(場市)가 개설되어 보부상(褓負商)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장 시에서 지역 특산품을 매입하여 생산되지 않은 지역으로 옮겨주고 품값을 받거나 판 매하기도 하면서 온 나라의 경제를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중앙과 지방, 지방과 지방 사이에 왕명 등 행정 명 령을 전달하고, 관리하기 위한 도로가 필요하였고, 통행과 공물·진상 등의 관물(官 物)운송, 군사 명령의 전달, 통신 및 교통시설로 역도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조선 세조 8년(1462)에 개설한 상운도(祥雲道)에는 찰방(察訪)이 관할(管轄)하는 역 이 16개 역으로 양양도호부에는 상운역 그리고 오색역, 연창역, 인구역, 강선역이 있 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공로인 역도를 이용할 수 없는 까닭에 바꾸미[物物交換]하던 일 반인들과 보부상은 짧은 거리인 박달령을 주로 이용하였다.
∎ 단목령 바꾸미 길
양양에서 출발하여 ⇒ 서문리 ⇒ 임천리 ⇒ 향재 ⇒ 상평리 ⇒ 장승리의 들돌거리 주막, 복상나무정주막 ⇒ 흑간리(黑澗里) ⇒ 서늘재(소양치) ⇒ 가라피리 ⇒ 마산리 (馬山里 : 현 오색1리 오색분교)의 솔정지주막 ⇒ 단목령 ⇒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218번지(점봉산 산림생태 관리센터)의 설피밭59)에 도착하여 인제지방의 읍내 장(3,8)으로 갔다.
<그림 5> 인제 기린면 진동리의 단목령
가. 보부상(褓負商)의 역할과 거래 물목(物目)
조선의 보부상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허가된 상인으로 대개는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범위로 형성되어 있는 상인 조직이다. 공식적으로 국가에 이력을 등록하고 신분증을 받아서 활동하였는데 시장을 돌면서 각 지방의 물품 교환을 촉진하였다,
목화솜을 좌우에 단 패랭이 모자가 보부상의 상징으로 국가에 세금은 물론 노역도 담당하였다. 특히, 임진왜란(1592~1597)과 정유재란(1597~1598), 동학농민운동 당시 선조(宣祖)는 보급을 위해 보부상을 동원했고, 이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년대)』에 의하면, 18세기 양양부에는 읍내장(3, 8일), 동산장(洞山場 4,9일), 물치장(4,9일), 부동장(府東場 3,8일), 상운장(祥雲場, 5, 10일)이 있었다.
18세기 당시 양양 도호부는 행정의 중심지역으로써 영서 지역과 교류의 중심지였 으며, 상운장과 동산장은 강릉 가는 길목으로 강릉지역을 포함한 남쪽 지역과도 활발 히 교류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제는 소규모 현으로 읍내(邑內)에 시장(市場)이 하나만 개설되어서 3일과 8일에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장시(場市)에서 거래된 물품으로는 쌀·콩·보리·조·기장·메밀 등의 곡물류와 면포·면화·삼베·모시·비단 등의 직 물류가 있다.
수공업 제품으로는 농기구·왕골자리·삿자리·초립(草笠)·유기(鍮器)·가죽신·의 복·신발·갓끈·빗·바늘·분(粉) 등과 수산물로는 조기·청어·준치·민어·굴 등이 있었다. 소·말·돼지·닭 등의 축산물과 감·밤·대추·배·사과 등의 과일류, 배 추·파·마늘·무우·오이·참외 등의 채소류도 있었다. 이 외에도 호랑이·사슴·노 루 가죽 등의 피물(皮物)이 유통되었는데 명주와 종이는 강릉과 양양에서만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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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금난전권은 17세기 후반 시전 상인들에게 배타적인 상업활동을 허가해 주던 권리이다.
59) 설피는 눈 위를 걸을 때 빠지지 않도록 넓적하게 만든 겉신으로 설피 마을이라는 이름은 설피를 만드는 덩굴(나무)을 경작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며 진동리는 이런 유래로 이름이 아예 ''설피밭''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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