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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346. 동정기(東征記-鳳巖集) / 채지홍(蔡之洪) - 한글 번역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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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25일 임오일에 연곡역(連谷驛)을 지나 주곡촌(注谷村)에서 점심을 먹었다. 동산역(洞山 驛)을 지나 후평포(後坪浦) 마을에서 잤다. 나루 사람들이 바다 반찬을 장만해 가져왔다. 해삼, 조개, 연어, 방어, 대구, 팔초 등 서남 지방에는 없는 것들이다. 광어와 판어(板魚)를 다 가자미[繰]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다.  삶고 구우니 눈이 배불러 입이 먼저 물린다.

    모래밭에는 물새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개 알을 낳을 시기인 꽃이 한창 피는 방춘(芳春) 에는 모두 외딴 섬에 들어가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곳은 파도에 울리는 모래밭과 해당화와 소나무 제방과 호수와 방죽이다.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를 끼고 왼쪽으로는 큰 고개를 끼고 있다. 바다는 아득하고 첩첩 산봉우리는 우뚝우 뚝 솟아 있다. 고깃배와 상선은 멀리서 가까이서 오가고, 연한 붉은 꽃과 아름다운 신록 은 좌우에서 한창이니, 참으로 그림 가운데 경치다.

    동쪽으로 바다 끝을 바라보니 하늘과 맞닿아서 끝도 없다. 나는 매우 기이하게 여겨 가마를 메는 이들에게,

    “배가 가서 저곳에 이르면 하늘 모양과 바다 색깔이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가마를 메 는 이들은 바닷가 사람들인데,

    “뱃사람의 말에,저 가운데 가도 하늘이 높고 바다가 넓어 한결같다.'고 합니다.”라고 대 답한다. 그 말이 비록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니 깨달을 만한 것이 있다. 바로 태산의 정상에 다시 하늘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동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층층이 절벽처럼 솟구쳐서 뿜어내는 물결이 백사장을 지나 길 위에까지 침범하여 크게 진동한다. 사람과 말이 때로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 비 록 바람이 없는 때라도 파도 소리는 항상 그치지 않고 거세게 부딪친다. 따라서 생각해 보니, 지봉(芝峰)이 바닷가 사람의 말을 전하여,

    “북쪽 바다가 북쪽에서 흘러 내려와 동해에 이르도록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람이 없어도 절로 파도가 일어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물에 조수가 없는 것은 또 한 멀리까지 흘러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그럴 듯하다.

    아아, 사해를 둘러 돌아보니 중국이 오랑캐에게 함락된 지 100년이 지났고, 오직 이 한 모퉁이만 더러운 때를 멀리 하고 있으니, 아마도 태공이 와서 문왕을 기다린 것과 같은 것인가. 다만 두보의 건곤을 씻는다는 구절을 외우며, 노중련(魯仲連)을 뒤따르지 못한 것만을 한스럽게 여긴다.

    26일 계미일에 양양부(襄陽府)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는 현산(峴山), 한수(漢水), 대 제(大堤)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별로 아름답지 않다. 동북쪽으로 10여 리를 가서 소나 무가 있는 고개를 넘으니 성문이 길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이것이 낙산사(洛山寺)다. 고려의 역사에 '충렬왕(忠烈王)이 대장공주(大長公主)와 더불어 이 절에 행차하였다「고 했 고, 스님들이 또한 '세조대왕이 오대산에서 와 이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절의 제도는 매 우 사치스럽고 아름다워 상원사와 자웅을 겨룬다고 하는데, 비교적 더욱 크고 웅장하다.

    승려들이 사는 요사(寮舍)는 10여 채로 반은 산 위에 있고 반은 산 아래에 있다. 서로의 거리가 30무(武)로 지름길은 매우 험하다. 아래 있는 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데 지붕 을 지어 덮었고 다듬은 돌로 제방을 만들었다. 샘물은 퐁퐁 솟구쳐 마르지 않지만 약간 짠맛이 난다. 위아래 절에 승려가 많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물을 길어다 써도, 심지어 큰 가뭄에도 물이 줄어들지 않고 넘쳐서 논이 되고 또 넘쳐서 웅덩이가 된다고 한다. 윗절 에 있는 승려는 물 길어 나르는 일에 고생이 심해서 해마다 아랫절에 있는 승려들과 번 갈아 바꾸어 산다고 한다.

    아랫절 동쪽을 지나 수십 걸음 가면 의상대(義相臺)가 나온다. 산 앞에 한 언덕은 머리를 바다에 드리우고 있는데, 굽어보니 천 길 절벽으로, 평평한 만 리의 푸른 바다를 마주 하 고 있다. 옛날 부상(扶桑), 약제(若齊), 울도(蔚島), 여평(如萍) 등은 이를 말한 것이 아닐까? 의상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의 뛰어난 승려로서 원효의 아우요, 홍유후(弘儒侯)의 숙 부다. 대 위에 있는 늙은 소나무 아래는 돌이 첩첩이 쌓여 있는데, 의상이 제계하고 앉 아서 관음의 말을 듣던 곳이라고 한다.

    대를 지나 구불구불 북쪽으로 10여 걸음 가서 보니 전(殿) 밑 부분이 양쪽 절벽에 비껴 걸터앉은 모습이 있다. 거친 파도가 치솟아 밤낮으로 각 밑에서 성난 소리를 내는 곳이 관음굴(觀音窟)이다. 또한 의상이 파란 새로 변해 이 굴에 들어온 관음을 보고 난 뒤에 관음상을 만들어 존모하는 마음을 붙였다고 한다. 거짓됨이 비록 심하긴 하나 매우 아름 다워 구경할 만하다.

    전의 남쪽 처마 끝에다 이름을 줄지어 쓰고 각각 율시 한 수씩 지었다. 우리들은 모두 늙었으니 어떤 사람이 다시 높은 벼슬에 오를런지 알지 못하겠구나.

    절에 오르니 동쪽 모퉁이에 일출을 바라보는 빈일료(賓日寮)가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기다렸다. 마침 바다가 어두워 장관을 잃었다. 어찌 조물주는 이리도 시기함이 많은가. 의상이 손수 심었다고 하는 오죽밭을 구경했다. 지금 1000여 년이 지났는데도 더해지지 도 않고 줄지도 않았다고 한다.

    담장 밖에는 이화정(梨花亭)이 있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에 배나무가 있었는데 배가 아주 많이 열렸답니다. 세조가 동쪽으로 순행할 때 승 려가 따서 동궁에게 바쳤는데, 이로써 관례가 되었지요. 계미년에 산불이 나 배나무가 재가 되었지요. 새로 심어서 가지가 겨우 한 움큼밖에 되지 않은데도 공납은 매년 같았 답니다. 지금도 폐하지 않고 공납합니다. 승려들은 공납이 힘들어서 그 나무를 가꾸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아, 한때의 공납이 백 년이 지난 뒤에도 폐단을 끼치니, 이름 없이 바치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마땅히 경계하던 일이다.

    중각(中閣)의 범종은 무게가 1,000근은 나간다. 세조가 명해 주조했고, 김수온(金守溫)이 기문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글씨를 썼다. 옛날의 자취를 찾아보려 하니 주지가 한 책 자를 내왔다. 기이한 말이 거의 대부분이고 괴이함에 가까워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임금이 하사하신 논밭과 백성이 백으로 헤아릴 그 이상으로, 한때 이름난 재상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간해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을 좇아 시주를 한 사람이 많았다. 충분히 후세에 비난을 들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