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동행기(東行記-書橋集) / 안석경(安錫儆) - 한글 번역
페이지 정보
본문
5월 1일(기해).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환허대사(喚虛大師) 신규(信奎)가 이별을 고했는 데, 그 말이 자못 정성스러웠다. 유평부(幼平賦) 한 수를 지어주기에 나도 차운하여 화답 하였다. 20리를 걸어 간성군의 청사를 지나갔다. 또 남쪽으로 10리를 걸어 선유담(仙遊 潭)에 들어간 뒤 가학정(駕鶴亭)에 올랐다.
선유담은 물결이 잔잔하고 넓게 퍼져 운치가 있었으며, 물고기와 새들이 많았다. 사방을 둘러싼 봉우리들에도 추한 기상은 없었다. 동쪽으로는 바다와 사이를 두고 있고, 일대에 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배들이 돛 가득 바람을 안고 가니 구름처럼 높은 파도가 일어난다. 작은 언덕이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갑자기 못의 가운데로 들어간다. 정자는 그 머리 부분에 있다. 그윽하고 조용하며 깨끗하여 매우 마음에 들었다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6, 7리를 가니 소리포(小梨浦)가 나왔다. 맑고 조용하며 경치가 밝 은데, 동해와 얕은 모래톱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구경하고 즐길 만하였다. 20리를 가서 청간정에 올랐다. 정자는 왼쪽으로 푸른 바위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 푸른 바다에 접하 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만경루(萬景樓)와 이어져 있다. 만경루는 비교적 높기 때문에 멀리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시판에는 택당 이식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만경루는 서남쪽으로 언덕을 이고 있는데, 그곳에는 운근정(雲根亭)의 옛터가 남아 있다. 남쪽으로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깨끗한 구름과 바위들이 보이며, 동쪽은 높아 큰 바다를 굽어볼 수 있다. 맑은 계곡을 따라 물이 모여드니 그 경치가 참으로 장엄하다 아쉽구나! 운근정의 허물어짐이여.
율촌(律村)에서 잤다 삼연 김창흡이 운근정을 매우 사랑하여 시를 지었는데, 뒷날에 포 부가 큰 선비가 나타나 반드시 다시 세울 것이다.
5월 2일(경자). 일찍 일어나 만경루에 올랐다. 일출을 기다렸는데, 이내에 가리어 보지 못하였다. 아쉬웠다. 남쪽으로 20리를 걸어 화암사(華巖寺)로 들어갔다. 화암사는 큰 산 을 이고 있으니, 바로 금강산 남쪽에 해당된다. 口 口 口는 자못 돌 빛을 띠고 있었다. 앞 으로는 계곡물을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화암(禾巖)을 대하고 있는데, 수백 길 높이 로 우뚝 솟아 있다. 위에는 물레방아가 12개가 있다고 한다.
남쪽으로 5리쯤 올라가서 석인대(石人臺)에 이르렀다. 석인대 위의 돌은 사람의 모습과 같은데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세 개로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활처럼 휘어지고 기다 란데, 위에는 절구 같이 뚫려 있어서 5, 6 곳에 물이 고인다. 석인대는 남쪽으로 천후산 과 설악산을 마주하고 있는데, 돌 모서리가 뾰쪽하게 솟아 있다. 동쪽으로는 세 개의 호 수와 동해의 물을 굽어보고 있다.
원호(圓湖)는 북쪽에 있고, 영랑호는 가운데에 있으며, 청초호는 남쪽에 있다. 통고(通高) 로부터 곤강(袞江)까지 4, 5백 리에 이르는 바다를 볼 수 있다. 듣자니, 명나라의 군대가 동쪽으로 와서 조선을 구할 적에 영랑호에 주둔하였다가 3일 만에 돌아갔는데, 돌아갈 때에 웃으면서, '천하의 절경이다. 아아.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은 삼연 김창흡이 계현(契玄)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한다.
영랑호는 탁 트이고 아늑한데 사방 언덕은 모두 흰 모래로 되어 있으며 기이한 돌이 많 다. 동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허공에서 아득하게 출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서쪽으로 는 설악산과 천후산, 화암봉과 석인봉이 둘러싸고 있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장군이 연연하여 떠나지 못한 것인가?
남쪽으로 15리를 가서 양양(襄陽) 땅에 있는 천후산 계조굴(繼祖窟)로 들어갔다. 5리를 내려와 내원(內院)에 갔다. 또 5리를 가서 신흥사(新興寺)에 들어갔다. 모두 옛날에 구경했던 곳이다. 미타전(彌陀殿)에서 잤다.(이하 일부 생략)
5월 3일(신축). 새벽에 이화정 위로 나아가 일출을 보았다. 구름이 조금 있었지만 바다는 고요하고 바람이 불지 않았다. 붉은 덩어리가 번드치고 들끓으며 출몰하는 모습을 보지 는 못하였고, 다만 큰 불 수레가 아득한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침 늦게 절문을 나서 몇 리를 걸어 송림으로 들어갔다. 동해묘(東海廟)를 보았는데 묘 의 왼쪽은 바다였다. 앞의 시냇물은 자못 조용하고 넓었다. 지켜서 보호하는 것이 엄하 지 않은지라 백성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성사를 이루었으니 놀랄 만하였다.
서쪽으로 10리를 걸어 태평루(太平樓)에 올랐다. 태평루 편액 안의 글자는 안평 대군(安 平大君)의 글씨로 문미 밖에 걸려 있고, 큰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문미 안에 걸려 있었다.
서쪽으로 몇 리를 걸어 임천(林泉)의 이씨 농막으로 들어갔다. 상사(上舍) 심보(心甫) 이 운일(李運一)과 함께 풍류와 사한(詞翰)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내용이 모두 다른 사람보 다 뛰어난데, 나의 풍악축(楓嶽軸)을 높이 쳐 주었다 그러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문장을 어찌 감히 학문이 높은 사람 앞에 당돌하게 내 놓겠는가? 이에 몇 편의 시를 외웠다. 이운일이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풍악산을 삼일 동안 유람하면서 이백칠십 수의 시를 얻었는데, 어찌 그대 는 이십 일 동안 산중에 있으면서 삼십 수를 채우지 못했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천 리 길을 여행하다 보니 피곤하여 붓을 잘 놀릴 수가 없었으며, 산 또한 매우 아름답 고 장엄하여 반드시 그에 합당한 말을 찾으려다 보니 붓을 함부로 놀릴 수가 없었다. 이 것이 시가 많지 않은 이유이다. 어찌 그대의 훌륭한 솜씨를 나의 졸렬한 솜씨에 비교하 여 논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5월 4일(임인). 임천에 머물면서 이운일이 소유한 만석정(萬石亭)을 찾았다. 이운일이 찾 아와 기문(記文)를 부탁하였는데, 피곤하여 사양하였다. 달계 서원(達溪書院)을 구경하였 다. 이유(李維)는 덕을 두터이 쌓아 문행(文行)으로 현달하였는데, 근후한 행동과 문장을 지닌 여러 후진들이 서숙(書塾)으로 찾아와 공부하고 있었다. 선비들이 파도처럼 모여드 니 공경할 만하였다. 저녁에 이운일의 집으로 가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5일(계묘). 이운일과 동행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갔다. 말 위에서 시를 지었는데 모두 다섯 수였다. 서림(西林)에 도착하여 헤어졌다. 이운일의 근후한 풍류와 정밀한 학문을 그리워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말을 타고 40리를 가서 갈애(葛厓)에서 잤다.
5월 6일(갑진). 구룡령(九龍嶺)을 넘어 모두 20리를 갔다. 명지거리(明紙巨里)에서 쉬었다. 10리를 가서 인암(印巖)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바로 강릉 지역이다. 수석이 아름다웠다. 20리를 가서 갈마담(渴馬潭)에 있는 김해운(金海運)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5월 7일(을사). 길을 나서 20리를 갔다. 두일창(斗日倉)을 지나 10리를 가서 덕치(德峙)를 넘었다. 다시 10리를 가서 이치(梨峙)를 넘었다. 홍천의 대올곡(大兀谷)을 내려오니 천석 이 아름다웠다. 35리를 가서 검산(劍山)의 합윤(蛤潤)에 있는 서씨의 농막에서 유숙하였 다. 검산의 동쪽 골짜기에 삼신산 폭포(三神山瀑布)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합윤의 하류 에는 대암 폭포(帒巖瀑布)가 있는데, 여름이면 대암에는 고기가 많다. 또 그 아래에 옥련 동(玉連洞)이 있는데, 수석이 기이하고 장엄하였다. 문수연(文殊淵)과 이어져 있다고 한 다. 이곳으로부터 기도(棋禱)로 들어갔는데, 또한 하루의 노정이 걸린다고 한다.
5월 8일(병오). 험한 길을 지나 모두 30리 길을 왔다. 횡성의 당현(唐峴)에서 쉬었다. 또 10여리를 가서 유곡(柳谷)에 있는 이씨의 농막에서 잤다.
5월 9일(정미). 아침 일찍 유곡의 입구를 나왔다. 비를 피하여 초현(草峴)으로 들어갔다. 잠시 피하니 곧 날이 개었다. 율동(栗洞)을 나와 동현(銅峴)을 지나 개곡창(介谷倉)을 거 쳐 중금(中金)에 있는 진씨(陳氏)의 농막에서 쉬었다. 수백(水白)을 지나 횡성 읍내에 있 는 이처사 집으로 갔다. 계암(階巖)을 향하여 출발했다. 이유평과 군자당(君子堂)에서 함 께 잤다. 환린(喚獜) 또한 같이 밤을 보냈다. 함께 산수를 유람하고 먼 길을 고생한 뒤에 이별하여 각각 동서로 떠나야 했으니, 그 아쉬운 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월 10일(무신). 이유평이 먼저 떠나고, 환린도 이별하고 떠났다. 여관에 앉아 있었는데, 무료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월 11일(기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원주의 계암을 지났다. 먼저 출발한 이유평이 10리 를 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암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보통리(普通里)에 도 착하였다.
5월 12일(경술). 일찍 길을 나서 흥원(興元)에 도착하였다.
5월 13일(신해). 안산(安山)에 들어갔다.
금강산의 둘레는 1,200리며, 그 석봉의 둘레는 360~370리이다. 큰 산줄기 동쪽을 외금강이라고 하는데, 그 길이는 160여 리이다. 서쪽을 내금강이라고 부르는데, 그 길이는 100 여 리이다. 토산(土山)과 석산(石山)을 합쳐 큰 봉우리만 헤아려도 일만 이천 개가 되며, 석산에 있어서도 크고 작은 봉우리를 합쳐 세어보면 또한 일만 이천 개가 된다. 12라는 숫자는 지방(地方)의 큰 수이다. 그런 까닭에 불가의 책에 '금강'이란 말을 실어 놓고, 또 한 절로 부합하게 한 것인가!
금강산에는 바위가 서 있는 것이 열에 아홉이나 된다. 그러므로 땅이 이루어진 초기에 성 대한 양의 기운이 엉겨 모여서, 뜨거운 것이 곧바로 올라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금강산의 동쪽 산기슭은 바다로 들어가 있는데, 모두 아름답고 기이하며 아득하여 어디 에서 끝나는지 알 수가 없다. 땅을 차지하고 있는 근저를 헤아려 보면, 또한 아름다운 것은 비교할 것이 없고 심후한 것은 끝이 없다. 그 겉으로 드러나 볼 수 있어서 천하에 서 경동(驚動)하는 것들은, 주머니 밖으로 드러난 송곳 끝에 불과하다. 복희씨는 괘를 그 려 예를 분별하였고, 요 임금은 정사를 잘하였으며, 공자는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그 온축된 바를 가지고 논한다면, 또한 천만에 한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 중에 구구한 재덕을 가지고 일에 적용하여 세상에 드러 나기를 바라는 자들은, 성급하고 망령됨이 심하도다.
-
- 이전글
- 346. 동정기(東征記-鳳巖集) / 채지홍(蔡之洪) - 한문 원문과 저자 소개
- 25.02.23
-
- 다음글
- 347. 동행기(東行記-書橋集) / 안석경(安錫儆) - 한문 원문과 저자 소개
- 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