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동유기(東遊記) / 가정(稼亭) 이곡(李穀) - 한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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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9년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장차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려고 14일 에 송도(松都)를 출발하였다.
21 일에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산 아래 장양현(長陽縣)에서 묵었다. 이곳은 산과 30여 리 떨어진 지점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조반을 서둘러 먹고 산에 오르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어두웠다.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풍악(楓岳)에 구경 왔다가 구 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하였다. 동행한 사람들 모두가 걱정하는 기색을 띠면서 말없이 기도를 드렸다. 산에서 5리쯤 떨어진 지 점에 이르자 음산한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그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절재(拜岾) 에 오르니 하늘이 활짝 개고 날씨가 청명해졌다.
그래서 안 보이던 눈꺼풀을 떼어 내고 바라보듯 산이 선명하게 보여서 이른바 일만 이 천 봉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었다 누구든지 이 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재를 통과해 야 하는데, 이 재에 올라서면 산이 보이고 산이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에 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재에 예전에는 집이 없었고 돈대(墩臺)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쉴 곳을 마련했었다. 그러다가 지정 정해년(1347, 충목왕 3)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인 강공 금강(姜公金剛) 이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한 다음에 이 재 위에다 종각(鐘閣)을 세워서 종을 매달아 놓고는 그 옆에 승려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우뚝 솟은 종각의 단청 빛이 눈 덮인 산에 반사되는 그 경치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 관이라고 할 만하였다.
아직 정오가 못 된 시각에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사미 (沙彌) 한 사람의 인도로 산에 올랐다. 사미가 말하기를 “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 이 있는데, 사람들이 사찰을 순례할 때에는 으레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골짜기가 깊고 길이 험합니다. 서북쪽에 정양암(正陽庵)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 태조가 창건한 암자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존상(尊相)을 봉안한 곳입니다. 비록 경사가 급하고 높기는 하지만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충분히 올라갈 수가 있고, 또 이 암자에 오르면 풍악의 여러 봉우리들을 한눈에 다 볼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관음보살(觀音菩薩)이야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느냐.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대개 이 산의 형승을 보려고 해서이다. 그러니 그 암자에 먼저 가야 하지 않겠느 냐”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탈길을 타고 어렵사리 올라갔더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 으므로 마음에 매우 흡족하였다. 보덕관음굴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해가 벌써 지려 하였 고 또 산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결국 신림(新林)과 삼불(三佛) 등 여러 암자를 거쳐 시내를 따라 내려와서 어스름 저녁에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해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산을 나왔다.
철원(鐵原)에서는 금강산까지의 거리가 300 리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실제로 500여 리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쪽 방향도 강과 산이 중첩한 가운데 길이 유심(幽深)하고 험절(險絕)하기 때문에 금강산을 출입하기 어려운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은 이름이 불경에 나와 있어서 천하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건축(乾竺)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사람들까지도 이따금 와서 보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눈으로 직접 보면 귀로 들은 것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동방의 사람들 중에 서촉(西 蜀)의 아미산(峨眉山)이나 남월(南越)의 보타산(補陁山)을 유람한 자가 있었지만, 모두 소 문보다 못하더라고 하였다. 내가 아미산이나 보타산은 가보지 못하였지만, 내가 본 이 금강산은 실로 소문을 능가하였으니, 제아무리 화가가 잘 그려 보려 하고 시인이 잘 표 현해 보려 하더라도 이 금강산을 비슷하게라도 형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23일에 장안사에서 천마(天磨)의 서쪽 재를 넘어 또 통구(通溝)까지 와서 묵었다. 무릇 산에 들어가는 자는 천마의 두 재를 거치게 마련인데, 재에 오를 때에는 산이 바라보이 는 까닭에 재를 넘어서 산에 들어가는 자들이 처음에는 험준하다는 걱정을 하지 않다가, 산에서 일단 재를 넘고 난 뒤에야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쪽 재는 조금 낮 은 편이지만 올라가고 내려오는 30여 리의 길이 무척 험하기 때문에 단발령(斷髮嶺)이라 고 부른다.
2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와서 하루를 머물렀다. 26일에 철령관(鐵嶺關)을 넘어 복령현 (福靈縣)에서 유숙했다. 철령은 본국의 동쪽 요해지로서, 이른바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 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문을 열 수 없다.”고 하는 곳이다. 그래서 철령 동쪽에 있는 강릉 (江陵) 등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고 칭한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년, 충렬왕 16년)에 반란을 일으킨 원(元)나라 대왕(大王) 내안(乃 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의 적도(賊徒)가 패배하여 동쪽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원나 라 개원로(開元路) 등의 제군(諸郡)으로부터 본국의 관동 지방으로 난입하였으므로, 국가 에서 만호(萬戸) 나유(羅裕) 등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철령관을 방호하게 하였다. 적도가 화주(和州) 영흥(永興)와 등주(登州) 안변(安邊) 이서(以西)의 여러 고을의 인민들 을 겁탈하고 노략질하였다. 그리고는 등주에 이르러 등주 사람으로 하여금 염탐하게 하 였는데, 나공(羅公)이 적도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철령관을 포기하고 도주하였으므로, 적 도가 마치 무인지경을 치달리듯 하였다. 이에 온 나라가 불안에 떨고 인민들이 피해를 입는 가운데 산성에 올라가고 해도로 들어가서 적도의 예봉을 피하다가, 끝내는 중국 조 정에 구원병을 요청한 뒤에야 겨우 섬멸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내가 본 바로는, 철령관의 험난함이야말로 한 사나이에게 지키게 하면 천 명, 만 명이 쳐다보고 공격하더라도 쉽사 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나공은 참으로 담력이 적었다고 하겠다.
27일에 등주에 도착해서 이틀 동안 머물렀는데, 지금은 그곳을 화주라고 칭한다. 30일 에 일찍 화주를 출발하여 학포(鶴浦) 어귀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국도(國島)를 관 광하였는데, 그 섬은 해안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다. 서남쪽 모퉁이로부터 들어갔더니 물가에 누인 비단처럼 흰모래가 깔려 있었고, 그 위로 평지 5, 6묘(畝) 정도가 마치 반벽 (半壁) 모양의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집터가 보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 면 승려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 위에는 한쪽이 트인 고리처럼 산이 에워싸고 있 었는데, 산세가 그다지 높지 않은 가운데 덩굴 풀만 덮여 있고 또 수목도 없었으니, 얼 핏 보기에 흙을 쌓아 놓은 하나의 제방 같은 인상이 들었다.
배를 타고 약간 서쪽으로 가니 단애(斷崖)와 물가의 언덕이 특이하게 변해 갔다. 단애의 바위들은 모두 직방형(直方形)으로 즐비하게 벽처럼 서 있었으며, 언덕의 바위들은 모두 평원형(平圓形)으로 배열되어 한쪽 면에 한 사람이 앉을 만하였으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다. 수백 보쯤 더 나아가니 수백 척은 될 만한 높이의 단애들이 나타났는데, 그 바위는 모두 백색에 직방형으로 장단(長短)이 한결같았다. 그리고 하나의 단애마다 그 꼭대기에 각자 하나의 작은 바위를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 같다는 느낌이 들 었는데, 얼굴을 위로 들고서 쳐다보노라니 아슬아슬해서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났다.
자그마한 동굴 하나가 있기에 배를 저어 들어갔으나 점점 좁아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 가 없었는데, 그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얼마나 깊은지 측량할 수가 없었다. 그 좌우에 묶어서 세운 것 같은 바윗돌들은 외면(外面)의 것과 같았으나 그보다는 더 가지런히 정 돈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 있는 바위가 지면까지 내려오는 형태도 모두 외면의 것들처럼 평정(平正)한 것이 한 판의 바둑을 복기(復碁)하여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아서 마치 일률적으로 잘라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본다면 외면만 그러할 뿐 이 아니라 하나의 섬 전체가 그야말로 한 묶음의 네모진 바윗돌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 기도 하였다. 그 동굴 속이 하도 험하고 깊어서 사람의 혼이 떨리게 하였으므로 오래 머 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가니 이번에는 한 면이 둘러친 병풍과 같은 곳이 있기에, 배를 놔두고 내려가서 배회하며 더위잡고 기어오르기도 하였다. 대개 그 바위는 동굴과 다름이 없었지만 단애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그 아래는 조금 평이하였으며 둥근 바위가 배열된 곳에는 1,000명도 앉을 만하였으므로, 유람을 온 사람들은 으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 머물러 술을 마시기도 하였으나 풍랑이 일까 걱정 도 되었고 게다가 그곳은 익힌 음식을 먹는 속세의 사람이 머물러 있을 곳이 못 되었다.
그 석벽을 따라 동남쪽으로 다시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바윗돌이 조금 특이하여 네모 진 철망의 형태를 하고는 바닷물을 그 속에 담아서 조그맣고 둥근 자갈을 갈아 내고 있 었는데, 길이는 5, 6십 척쯤 되었다. 서 있는 석벽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한 면은 모두 그와 같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철망석(鐵網石)이라고 하였다. 이상이 국도(國島) 의 대략적인 경치이다. 그러나 그 기절(奇絕)하고 괴이한 형상으로 말하면 필설로는 방 불하게 표현할 수가 없으니, 조화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이런 극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포구로 돌아온 뒤에 술잔을 들며 서로 치하하였으니, 하나는 승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 이요, 다른 하나는 풍랑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구에서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鶴浦) 라는 곳으로 들어가서 원수대(元帥臺)에 올랐는데, 100경(頃)의 맑은 호수에 한 점 고둥 처럼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또한 하나의 기관(奇觀)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더 머물 수 없기에 현관(縣館)에 들어와서 묵었다.
9월 초하룻날에 흡곡현(歙谷縣)의 동쪽 재를 넘어 천도(穿島)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그 형상을 물어보았더니 “그 섬에 굴이 있는데 남북으로 뚫려서 풍도(風濤)만 서로 드나들 뿐이다. 그렇지만 그 천도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총석정(叢石亭)에 갈 수 있는데, 그 거리는 8, 9리쯤 된다. 그리고 총석정에서 바다를 또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金蘭窟)에 갈 수 있는데, 그 거리 역시 10여 리쯤 된다. 배 안에서 보이는 승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날 바람 기운이 약간 있어서 배를 탈 수가 없기에 천도는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을 따라 총석정에 갔더니 통주(通州)의 수재(守宰)인 심군(沈君)이 총석정 위에 와서 기다리 고 있었다. 이른바 사선봉(四仙峯)이라는 것을 보니, 바위를 묶어서 세운 듯 한 것과 그 몸통이 직방형인 것은 대개 국도의 경우와 같았으나, 다만 색깔이 검고 단애의 바위 또 한 들쭉날쭉해서 가지런하지 않은 차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 건대, 네 개의 봉우리가 저마다 따로 우뚝 솟아서 깎아지른 듯 한 단애의 위용을 자랑하 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만 리의 푸른 바다를 굽어보고 서쪽으로는 천 겹의 준령을 마주 하고 있었으니, 실로 관동의 장관이었다.
예전에는 비석이 단애 위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받침돌만 남아 있을 뿐이 다. 또 동쪽 봉우리에 오래된 비갈(碑碣)이 있는데, 비면(碑面)이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 어져서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으니, 어느 시대에 세워진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新羅) 시대에 영랑(永郎)•술랑(述郎)•도(徒)•남(南) 등 네 명의 선동(仙童)이 그 무리 3,000인과 함께 해상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비갈 은 그들 무리가 세운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이 또한 상고해 볼 길이 없다. 사선봉에 임 하니 자그마한 정자가 있기에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날이 저문 뒤에 통주(通州)에 와서 유숙하였다. 통주는 옛날의 금란현(金蘭縣)이다. 그 래서 성 북쪽 모퉁이에 있는 석굴을 사람들이 금란굴(金蘭窟)이라고 말하는데, 그곳은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이튿날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들어가 멀리서 바라보 니 희미하게 보살의 형상이 굴속에 서 있는 것도 같았으나, 그 굴이 워낙 깊고 비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배를 조종하는 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거주한 지 오래됩니 다. 그런데 원조(元朝)의 사화(使華 사신)와 본국의 경사(卿士)는 물론이요, 부절(符節)을 나눠 받고 한 방면을 다스리는 자로부터 아래로 유람하며 구경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여기에 와서는 이 굴을 반드시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나에게 배를 이곳으로 인도하게 하였으므로 나로서는 정말 질리게 와 본 셈입니다. 내가 일찍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를 조종하여 혼자 굴속에 들어가서는 끝까지 철저하 게 살펴본 적이 있는데, 특별히 보살처럼 보이는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손으로 만져 보아도 한쪽 면에 이끼가 낀 바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굴을 나와서 뒤돌아보 니 또 관음보살의 형상을 방불케 하는 것이 서 있지 않겠습니까. 아, 나의 정성이 미흡 해서 굴속에서 보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항상 그런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생각 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현상이 보인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못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금란굴 동쪽에 석지(石池)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관음이 목욕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또 암석이 밀집해 있는데, 아주 작은 크기의 것들이 무려 수 묘(畝)에 걸쳐 깔려 있기도 하 였다. 그런데 모두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이 암석들을 사람들이 통족암(痛足 岩)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개 관음보살이 발로 밟다가 통증을 느끼자 바위가 보살을 위해서 옆으로 몸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란굴을 출발하여 임도현(林道縣)에 와 서 묵었다.
초사흩날에 고성군(高城郡)에 도착하였다. 통주에서 고성에 이르는 150여 리의 길은 실 로 풍악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산세가 깎아지른 듯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사람 들이 이곳을 외산(外山) 외금강(外金剛)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대개 내산(內山) 내금강(內 金剛)과 기괴한 경치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남쪽에 유점사(榆岾寺)가 있는데, 그 절에는 대종(大鍾)과 53불(佛)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 시대 에 53불이 이 종을 타고 서쪽 천축(天竺)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고성의 해안에 정박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유점사까지 와서 멈추었다고 한다. 고성 남쪽에 있는 게방촌 (憩房村)은 바로 금강산의 기슭에 해당하는데, 이 게방촌에서 60리쯤 곧장 위로 올라가 면 유점사에 이른다. 내가 처음에는 함께 유람 온 사람들과 함께 반드시 유점사까지 가 서 그 종과 불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거리가 먼데다가 길이 또 험해서 말이 모두 등창이 나고 발굽을 다친 탓으로 뒤처진 자가 있었으므로 더 이상 산에 오를 수가 없었다.
초나흗날에 아침 일찍 일어나 삼일포(三日浦)에 갔다. 삼일포는 성에서 북쪽으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배를 타고 서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갔는데, 그 섬은 무지개 모양의 거대한 하나의 암석이었다. 그 꼭대기에 석감(石龕)이 있고 그 안에 석불이 있었 으니,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미륵당(彌勒堂)이었다.
그 단애(斷崖)의 동북쪽 벽면에 여섯 글자로 된 붉은 글씨가 보이기에 그곳에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더니, 한 줄에 세 글자씩 두 줄로 “술랑도남석행(述郎徒南石行)”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술랑 남석' 네 글자는 매우 분명하였지만, 그 다음의 두 글자는 희미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옛날에 그 고을 사람이 유람 온 자들을 접대하기 가 괴로워서 이 글씨를 깎아 내려고 하였지만, 5촌 가량이나 깊이 새겨져 있었던 까닭에 자획을 없애지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 이 두 글자가 분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 때문 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뒤에 배를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올라갔는데, 이곳 역시 호수 가운데의 하나의 섬 이었다. 이리저리 배회하며 돌아보았더니, 이른바 36봉(峯)의 그림자가 호심(湖心)에 거 꾸로 박혀 있었다. 100경(頃)쯤 되는 넓이에 맑고 깊은 물이 가득 넘쳐흐르는 이 호수의 경치 또한 실로 관동의 승경으로서 국도(國島)에 버금간다고 할 만하였다. 이때 군수가 없어서 그 고을 아전이 자그마한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혼자 마실 수는 없기에 배를 준 비하게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호수는 사선(四仙)이 노닐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36봉에는 봉우리마다 비석이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모두 가져다가 물속에 가 라앉혔다고 한다. 지금도 그 비석의 받침돌은 아직 남아 있다. 호종단이란 자는 이승(李 昇)의 당(唐)나라 출신으로 본국에 와서 벼슬하였는데, 오도(五道)에 나가 순시할 적 본 국에 와곳마다 비갈을 가져다가 비문을 긁어 버얬 가 하면 깨뜨리기도 하고 물속에 가 라앉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종경(鍾磬)까지도 유명한 것들은 모두 쇠를 녹슬하용접해서 소리가 나지 않게 틀어막았다고 한다. 리고 한송정(寒松亭)과 총석정(叢 石亭)과 삼일포(三日浦)의 비석, 그리고 계림부(鷄林府) 봉덕았다奉德한다의 종 같은 경 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그리고 선정은 박군 숙진(朴君淑眞)이 이 지역을 존무(存撫)할 때 세운 것인데, 좌주(座主)인 익재(益齋) 선생이 기문을 써 주셨다. 삼일포에서 성 남쪽 의 강물을 건넌 뒤에 안창현정(安昌縣亭)을 지나 명파역(明波驛)에서 유숙하였다.
초닷샛날에 고성(高城)에서 묵어 거기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초이렛날에 주인이 선유담 (仙遊潭) 위에서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청간역(淸澗驛)을 지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가서 약간 술을 마시고 인각촌(仁覺村)의 민가에 묵었다.
초여드렛날에 영랑호(永郎湖)에 배를 띄웠다. 날이 기울어서 끝까지 돌아보지 못하고,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세음보살)를 참알(參謁)하였다. 사람들의 말 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이곳에 머문다고 하는데, 산 아래 석벽에 있는 동굴이 바로 관음 보살이 들어가서 머무는 곳이란다. 저녁 늦게 양주(襄州)에 도착해서 묵었다.
그 다음날은 중구일(重九日)인데, 또 비가 와서 누대 위에서 국화 술을 들었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유숙하였는데, 그곳에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다. 11일에 연곡현(連谷 縣)에서 묵었다.
12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경포대에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 돌 아궁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 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에 의해 물속 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 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정자에서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서 재를 넘을 수가 없기에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숙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역을 지나서 동쪽 산봉우리를 오르는데 길이 매우 험하였 다. 등명사(燈明寺)에 도착해서 누대 위에서 일출을 구경하고, 마침내 바다를 따라 동쪽 으로 향하여 강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재를 넘어 우계현(羽溪縣)에서 묵었다. 12일에 삼척현(三陟縣)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오십천(五十川)의 팔 영(八詠)이라는 것을 마음껏 살펴보고 나와서 교가역(交柯驛)에 이르렀다. 이 역은 현의 치소(治所)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곳에서 15리를 가면 바다를 굽어보는 단애 위에 원수대(元帥臺)가 있는데, 또한 절경이었다. 그 위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는 마침내 역사에 묵었다. 18일에 옥원역(沃原驛)에서 묵었다. 19일에 울진(蔚珍)에 도착하여 하루 를 머물렀다.
21일에 아침 일찍 울진을 출발하였다. 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는데, 그 절은 석벽의 단애 아래 장천(長川) 가에 위치하였다. 단애의 석벽이 1,000 척의 높이로 서 있고 그 석벽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을 성류굴(聖留窟)이 라고 불렀다. 그 동굴은 깊이도 측량할 수 없었지만 으슥하고 어두워서 촛불 없이는 들 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의 승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는, 또 출입에 익숙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앞뒤에서 돕게 하였다.
동굴의 입구가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4, 5보(步)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기에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3장(丈)쯤 되는 단애가 나타났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점점 평탄해지는 가운데 공간이 높다랗고 널찍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畝)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으며,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다시 10여 보를 걸어가자 동굴이 또 나왔다. 그런데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보다 훨씬 비 좁아서 아예 배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기어갔는데, 그 아래가 진흙탕이었으므로 돗 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하였다.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 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 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 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또 못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그 못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와 비슷하고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으며,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 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라서 그다지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각각 소리가 나면서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 향을 발하는 것이 마치 편경(編磬)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 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 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 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동굴 안을 끝까지 탐험한 사람은 없 다. 하지만 평해군(平海郡)의 해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거 리는 대개 여기에서 20여 리쯤 된다.”라고 하였다.
앞서 동굴 입구에서 옷에 훈김이 배고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동복(僮僕)의 의건(衣巾) 을 빌려 입고 들어왔는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의복을 갈아입고는 세수하고 양치질 을 하고 나니, 마치 화서(華胥)를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퍼뜩 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 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 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 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이날 평해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군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사선(四仙)이 유람 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평해군은 강 릉도(江陵道)의 남쪽 경계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릉도는 북쪽의 철령(鐵嶺)에서부터 남쪽 의 평해까지 대개 1,200여 리의 지역을 관할하는데, 평해 이남은 경상도의 경내에 속한 다. 이곳은 내가 일찍이 갔다가 온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稼亭先生文集 卷之五,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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