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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蘘陽의 漢詩

    2. 동행기 (東行記) / 서하(西河) 임춘(林椿)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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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세상에서 산수를 논하면서 강동(江東) 지방을 가장 좋은 곳이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조물주가 하늘이 물(物)을 창조할 때에 진실로 어디는 좋게 어디는 나쁘게 하려는 마음이 없다. 어찌 한 쪽 지역에만 후하게 했겠는가.” 하였다.

    남쪽 지방으로 다니면서 경치가 빼어난 곳은 모두 찾아다니며 보았다. 천하의 좋은 경 치라는 것이 아마 이 이상 더 나은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동쪽으로 발길을 돌 렸다. 명주(溟州), 원주(原州)의 경계부터는 풍토가 특별히 달라지는데 산이 더욱 높고 물이 더욱 맑았다. 일천 봉우리와 일만 골짜기는 서로 빼어남을 경쟁하는 듯하였다.

    백성들이 그 사이에 거주하는데 모두 비탈에서 밭을 갈고 위태롭게 거두어들이는 것 을 보니, 딴 세상이 있는 듯 놀라워, 과거에 다니며 보던 곳은 마땅히 여기에 비하여 모 두 모자라고 부족하여 감히 거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 에 순수하고 웅장한 기운이 홀로 어리어 이곳이 된 줄을 알게 되었다.

    죽령(竹嶺)에서 서쪽으로 20여 리를 가면 당진(唐津)이라는 물이 있다. 아래에는 자갈 이 많은데 모양이 모두 둥글고 반질반질하며 푸른빛이 난다. 빛은 투명하여 물이 푸르게 보이며, 잔잔하여 소리가 나지 않고, 물고기 수백 마리가 돌 사이에서 장난을 하고 있었 다. 좌우편은 모두 어마어마하게 깎아 세운 듯 산이 솟아서 만 길이나 될 듯한데 붉은 바탕에 푸른 채색을 올린 것처럼 보인다.

    벼랑과 골짜기의 모양은 요철(凹凸)같아 움푹하기도 하고 불룩하기도 하여 두둑 같기 도 하고 굴 같기도 하다. 기이한 화초, 아름다운 대나무가 엇갈리게 자라서 그림자가 물 밑에 거꾸로 비친다.

    이러한 것은 그 대략만을 적었을 뿐이요, 그 기묘하고 수려한 점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마침내 끊어진 벼랑 어귀에서 말을 내려 석벽(石壁)이 있던 자리에서 배를 띄웠다. 배 안에서 사람이 말을 하면 산골짜기는 모두 메아리를 친다.

    곧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만족하게 놀면서 하루 종일 돌아가기를 잊었 다. 어두운 저녁 빛이 먼 데서부터 스며들었다. 그곳이 너무 싸늘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 시(詩) 한 편을 읊어서 거기에 써놓고 그곳을 떠났다.

     

    푸른 물 출렁출렁 쪽빛과 같은데

    물결에 비친 푸른 절벽은 험한 바위가 거꾸로 있듯 

    만 리 길 정처 없이 동으로 가는 나그네

    홀로 돛대 한 폭을 가을바람에 걸고 가네

     

    碧水溶溶色似藍 

    映波靑壁倒巉巖

     飄然萬里東征客 

    獨掛秋風一幅帆

     

    내가 동쪽 지방으로 수레바퀴와 말발굽을 끌고 다닌 곳이 많았으나,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만일 서울 부근에 가까이 있었다면, 놀기 좋아하는 귀족들은 반드시 하루 에 천 냥씩이라도 값을 올려 가면서 다투어 사들일 것이다.

    다만 먼 지역에 떨어져 있어 오는 사람이 적고 간혹 사냥꾼이나 어부가 여기를 지나지 만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장차 여기를 숨겨 두었다 우리같이 궁하고 근심 있는 사람을 기다린 것일 듯하다.

    명주(溟州)의 남쪽 재를 넘어서 북으로 해변에 이르자, 조그마한 성(城)이 있는데 동산 (洞山)이라 하였다. 민가가 사는 촌락은 쓸쓸하고 매우 궁벽하였다. 그 성에 올라서 바라 보니 어스름 저녁 빛이 어둑어둑하여지는데, 길옆에 고기잡이하는 집에는 등불이 가물거 렸다. 이런 풍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며 고향을 떠난 서글픔에 쓸쓸 한 감상이 일어나서 슬픔을 자아낸다.

    밤에 객주집에서 잤다. 석벽에 기대어 무릎 꿇고 앉으니, 강물 소리 출렁거리며 그칠 줄을 모른다. 우레가 터지는 듯, 번개가 치는 듯, 사람의 머리끝을 쭈뼛하게 하였다. 부 견(符堅)이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와서 강남(江南)을 공격할 때에 군사를 지휘하여 퇴각 시키다가 엉겁결에 대오가 무너져 걷잡을 수 없어 장비와 물자를 다 내버리고 빨리 달 아나던 모양과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웅장한 것인가. 마침내 시(詩)를 썼다.

     

    바다에 나간 사람 반이나 되니 주민들은 적막하고 

    백 길이나 되는 산마루에 높은 건물이 솟아있구나 

    돛대 그림자 가볍게 날아오니 생선 파는 시장은 넓어가고 

    물결이 다투어 주름지니 바다 어귀는 아득하여라

     

    居民寂寞半溟濤 

    百丈峯頭揷麗譙 

    帆影輕飛魚市闊 

    浪花爭蹙海門遙

     

    싸늘한 황혼이 달빛을 띠고 말안장에 실려 왔는데 

    밤중 밀물 소리에 나그네의 베개머리는 시끄럽구나 

    오강정 위에서 바라보는 운치만 못하지 않아 

    붉은 단풍 푸른 귤이 긴 다리에 비추는구나


    征鞍冷帶黃昏月 

    客枕頻喧半夜潮 

    不減吳江亭上望 

    丹楓綠橘映長橋

     

    새벽에 마을에서 들려오는 닭소리를 듣고 떠나서 낙산(洛山) 서쪽을 지나는데, 길옆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가 있었다. 마디와 새싹이 뚜렷하고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하여 땅을 덮고 있는데, 그 그늘 주위가 몇 십 보(步)나 되어 보이는데 특이하다.

    소나무가 이렇게 기괴하게 생긴 것이 세상에 또 다시 있을까. 골 안은 깊숙하고 고요하 며 구름 어린 물은 흐릿하여 아마도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요 신선이 거주하던 곳인 듯, 높은 선비의 유적이 완연히 있었다.

    나는 옛날 신라(新羅)의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두 법사가 신선굴 속에서 관음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사실을 생각했는데, 범상한 몸과 속된 정신이라 신선을 만나지 못하고 돌 아감을 탄식하였다.

    남아 있는 이야기를 물어보려 하였으나 다만 산만 길게 뻗쳤고, 물만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을 뿐, 수백 년 동안에 옛집과 남은 풍속이 모두 없어졌다. 이에 절구(絕句) 두 편을 지어 이를 그리워하였다.

     

    일찍이 들었노라 거사인 늙은 불제자는

    지팡이를 휘날리며 허공을 건너서 만 리 길을 지나가네 

    벌써 문수보살을 보내어 문병하러 왔으니

    일 없이 비야리(중인도의 지명)로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曾聞居士老維摩 

    飛錫凌空萬里過 

    已潰文殊來問疾 

    不應無事出毘耶

     

    이 작품은 원효를 가리킨 것이다.


    지팡이를 휘날리며 좋은 곳을 찾아 외로운 바닷가에 이르렀더니 

    묘한 양상 바라보니 허무에서 나왔네

    대사로 인연하여 신령한 응답을 돌리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신룡의 진주 한 덩이를 얻어 낼 수 있었으랴

     

    飛錫尋眞海岸孤 

    親瞻妙相出虛無 

    不緣大士廻靈應 

    爭得神龍一顆珠

     

    이 작품은 의상(義相)을 가리킨 것이다.

     

    한성(捍城)에서부터 북쪽은 가보지 못하였다. 세상에서 전하는 총석(叢石), 명사(鳴沙)같 은 곳은 모두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강동에서 구경한 것은 정말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만약 모두 구경하였다면 비록 수만 장의 종이를 다 쓰며 천 자루의 붓이 다 망가진들 어떻게 모두 적을 수 있었으랴. 옛날에 사마태사(司馬太史)는 일찍이 회계(會稽)에 가서 우혈(禹穴)을 구경하여 천하의 장관을 다 보았으므로, 더욱 대단하여 그 문장이 시원스 럽고 웅장한 기운이 있었다.

    무릇 대장부가 널리 돌아다니며 먼 곳으로 구경을 다니어 천하를 휘젓는다면, 장차 그 가슴속의 수려한 기운을 넓히게 된다. 내가 만일 명예나 벼슬에 얽매어 있었다면 반드시 그 기이한 것들을 끝까지 찾아다니면서 평소에 가졌던 뜻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 기에서 하늘이 나에게 후한 혜택을 베풀어 주셨다. 월일모(某)가 적는다.

     

    世之論山水者。以江東爲秀地。余獨未信日。造物者。固無心於與奪。安肯私于一方邪。 及遊南國。凡以奇勝絕特自名者。咸所冥搜饜見。以爲天下之奇觀。殆無出於此矣。又去 而之東。自溟原一州之境。風土特變。山增高水益淸。千峯萬壑。誇奇競秀。民居其閒。 皆側耕危穫。怳然若別造一世界。向之所歷者。宜皆遜讓屈伏。無敢與抗矣。然後知混沌氏 始判淸濁。混淪磅礴。獨凝結而爲是也。竹嶺之西二十餘里。有水名唐津。下多細石。皆圓 熟而靑色。色徹而水碧。沉沉無聲。魚可數百尾。戲于石間。左右皆巖巖積峙。壁立萬仞。 如丹而碧之。崖谷之勢。呀然窪然。若垤若穴。奇卉美箭。交生羅絡。影倒水底。大略如 此。而其奇麗不可狀。遂下馬斷岸口。泛舟於石壁之址。舟中人語。山谷皆應。乃嘯詠自 得。終日忘歸。蒼然晚色。自遠而至。其境過淸。不可久留。吟一詩題之而去。碧水溶溶色 似藍。映波靑 壁倒巉巖。飄然萬里東征客。獨掛秋風一幅帆。自余東邁。車轍馬迹之所及多 矣。淸絕之地。莫有過此者。如近置於京邑。則貴遊必日增千金而爭買矣。以僻在荒壤。 人罕能至。時時有獵夫漁老。過而不顧。此必天將秘之。以待吾輩窮愁之人爾。至登溟州 南嶺。北出海畔。有小城日洞山。人民聚落。蕭 然甚僻。登其城以望之。薄暮冥冥。道傍漁 舍。燈火隱顯。使人有懷鄕去國。凄然感極而悲者。夜宿傳舍。倚壁危坐。江聲渹渹不已。 雷輥電擊。竪人毛髮。若苻堅以百萬之師。來伐江南。麾陣而却。驚潰不止。弃器械輜重 而疾走也。何其壯哉。遂題詩日。居民寂寞半溟濤。百丈峯頭揷麗譙。帆影輕飛魚市闊。浪 花爭蹙海門遙。征鞍冷帶黃昏月。客枕頻喧半夜潮。不减吳江亭上望。丹楓綠橘映長橋。曉 聞 村雞一號。行過洛山之西。路有孤松。節目磥砢。枝幹屈盤。蔭地而周圍者數十步。異 哉松之奇怪。世復有如是者耶。洞天幽寂。雲水沉沉。殆非人閒之境。仙靈之所居。高士 之逸迹。宛然在焉。余感昔新羅元曉,義相二法師。親謁觀音於仙窟中。自歎其骨凡氣俗。 未遇而返。欲問遺事。則徒見其山長水流。而數百年閒。故家遺俗盡矣。乃作二絕以懷之日 。曾聞居士老維摩。飛錫凌空萬里過。已遣文殊來問疾。不應無事出毗耶。謂元曉也。飛錫 尋眞海岸孤。親瞻妙相出虛無。不緣大士迴靈應。爭得神龍一顆珠。謂義相也。自捍城以 北。未有所歷。若世所傳叢石鳴沙。皆不目焉。則今之見於江東者。眞大倉一稊稗耳。設 使盡觀。雖窮萬穀之皮。禿千兔之翰。安能盡紀耶。昔司馬太史。甞遊會稽。窺禹穴以窮 天下之壯觀。故氣益奇偉。而其文頗踈蕩而有豪壯之風。則大丈夫周遊遠覽。揮斥八極。將 以廣其胷中秀氣耳。余若桎梏於名檢之內。則必不能窮其奇採其異。以償其雅志也。有以 見天之厚余多矣。月日某記。

    『東文選』卷之六十五,記,東行記

     

    임춘의 출생과 사망날짜를 알 수 없다. 본관은 예천(醴泉)이고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고려 건국공신인 조부 중간(仲幹)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충경(忠敬)이 라는 시호를 받았다. 부친 광비(光庇)와 백부 종비(宗庇)는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내 구귀족사회에서 일정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죽림칠현(竹 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규보와 함께 고려의 중심 문인으로, 이인로, 오세재 등과 더불 어 죽림고회(竹林高會)에 나가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하여 고려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20세를 전후한 의종 24년(1170년)에 무신란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임춘의 일가 가 화를 당하여 조상대대의 공음전(功蔭田)도 모두 빼앗겼다. 풀한 포기 심을 땅이 없다 는 말에서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개경에서 5년 정도 숨 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어쩔 수 없이 가솔들을 이끌고 영남 상주 의 개령으로 옮겨가 7년여의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것들이다. 김부식 이래로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시 문 풍(文風)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문집으로 『서하집』이 있으며, 한국 가전문학(假 傳文學)의 작품인 「麴醇傳」과「孔方傳」을 남겼다.

    이 작품은 임춘이 우리나라의 산수는 江東 최고라는 말을 듣고 남쪽지방을 탐방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감회와 역사를 기술하였다. 낙산사를 찾아 옛날 원효와 의상 두 법사가 신선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신 스스로 범상한 몸과 속된 정신이라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감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두 법사를 그리워하며 두 편의 시로 감회를 표현하였다.

    마지막에 대장부가 먼 곳을 두루 여행해야만 가슴속 후련한 기운을 넓히게 된다고 하 면서 만약 자신이 명예나 벼슬에 얽매어 있었다면 기이하고 아름다운 승경을 탐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은 속세의 구속 없이 호방하고 자유롭게 살 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