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蘘陽의 漢詩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10. 낙산사에 있는 관음보살의 ... /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

    페이지 정보

    조회 21회

    본문

    낙산사에 있는 관음보살의

    복장을 보수한 데 대한 문 병송. 최 상국을 대신해서 지음.

    최상국은 지금의 진양후다

    (洛山觀音腹藏修補文 并頌代崔相國 行,今晉陽侯也)

     

    운운 넓게 생각하니 동해 변 낙산 가에 한 승지(勝地)가 있는데 청정하여 티끌 한 점 없으니, 수월(水月 물속에 비친 달)의 청수한 실상이 이곳에 의탁하였다. 아, 저 완악한 오랑캐는 무지막심하도다. 모름지기 그들이 횡행하며 노략질할 적에 심지어 절의 불상까 지도 훼손을 입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우리 대성(大聖)의 존구(尊軀)도 또한 그러하여 비록 형체는 겨우 보존되었으나 복중(腹中)의 진장(珍藏)은 모두 수탈당하거나 흩어져서 텅 비었다.

    지인(至人)의 경계는 본래 영허(盈虛)' 소식(消息)의 이치가 없는데, 금강(金剛)의 진체 (眞體)에 어찌 훼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범부(凡夫)의 보는 바에 있어서는 어찌 상심이 되지 않으랴. 하물며 제자(弟子)로서는 경앙하는 마음이 전부터 간절하였었는데, 이제 복 중의 진장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남보다 배나 가슴 아프게 여기고 동시에 용감히 보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전일의 소장된 것을 참작하여 삼가 심원경(心圓鏡) 2 개와 오향(五香)、오약(五藥)、색사(色絲)、금낭(錦囊)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추어 복중 을 채워서 완전히 복구하여 예전 것과 손색이 없게 하였으니, 바라던 바에 무슨 문제될 게 있겠는가. 운운.

    제자는 머리를 조아리고 이마를 두드리며 이어 단송(短頌)으로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마침내 헐어버리지 못할 것은 究竟不毀

    금강의 진신이다 金剛眞身

    그 밖의 상설이야 外之像設

    이루고 허는 일은 사람 成毀由人

    사람이 똑같지 않은데 人非一類

    공경하거나 업신여기네 或敬或侮

    저들은 업신여겨 손상하고 彼侮而殘

    나는 공경하여 보수하네 我敬而補

    저 이지러진 달과 같아 如月斯缺

    얼마 안 가서 다시 둥글었네 未幾復全

    모든 사녀(士女)들은 凡百士女

    한 마음으로 가라 一心歸處

     

    洛山觀音腹藏修補文并頌代崔相國行,今晉陽侯也

     

    云云。洪惟東海之濱洛山之上。有一勝境。淸淨無塵。水月睟相。於是乎寄焉°嗟乎。憬彼 頑戎。無知莫甚。方其橫行冠掠也。至於佛宇梵相。無不被其殘毀者。我大聖尊軀亦爾。雖 形體僅存。而腹中之珍藏 盡爲搜露散頓° 枵然其空矣。且至人境界。本絕盈虛消息之理。 則金剛眞體。寧且有毀滅耶°然在凡夫所覩。得不愴然傷心哉。況如弟子者。仰止之心。自 昔滋切。乃今聞腹藏潰散之事。能不倍痛於人。而勇爲之補理耶。是用挨舊所藏。謹備心圓 鏡二事及五香五藥色絲錦囊等衆緣。以充其服。完而復之。與昔無損。庸何傷乎。所願者云 云。弟子頓首扣顤。仍以短頌贊之云°

    究竟不毀 金剛眞身。外之像設。成毀由人。人非一類 或敬或侮。彼侮而殘。我敬而補。 如月斯缺。未幾復全° 凡百士女。一心歸虔。

     

    『東國李相國全集』卷第二十五,雜著

     

    이규보(의종22년, 1168~고종28년, 1241년)의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이고 초 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다. 시, 거 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렀다.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다양한 서책을 섭렵하여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9 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 재(奇才)라 불렀지만 사마시에서 계속 낙방하였다.

    명종 20년(1191년)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이 돌아가시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장자사상에 심취하였다. 고종17년(1230년)잠시 위도에 귀양 갔다 다시 기용되어 집현전대학사, 정당문학, 태자소부,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고종24년(1237년)문하 시랑평장사로 관계에서 사퇴하였다.

    69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문란한 정치와 사회적 혼란을 보고 동명 왕편(東明王篇)을 지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전반기에는 불운하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 최충헌 정권에 노력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환로에서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 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의 행적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무신 권력에 아첨한 지조 없는 문인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은 역대 최고의 문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저서로는 『東國李相國集』, 『白雲小說』, 『麴先生傳』등이 있다.

    최고의 문인으로, 자신의 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 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우리 문학사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文士이다. 이러한 이규 보가 낙산사에 있는 관음보살의 진신이 거란의 침략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관음상의 형체만 보존되었으나 복중의 귀중한 물건들이 모두 수탈당하여 텅 비어 있었다. 이에 최우 는 명에 의하여 완전히 복구하고 이규보로 하여금 복장을 보수하고 보수문을 짓도록 하 였다. 이에 이규보가 칭송하며 찬한 이 작품은 양양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