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풍악록(楓岳錄) 백호(白湖) 윤휴(尹鑴) / 한글 번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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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 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출발하여 통제(統制)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곤 『주역』두 권과 일기책 한 권뿐이다. 나머지 일행들의 필 요한 여행 도구를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삼촌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삼촌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 (樓院)에서 말에 꼴을 먹이면서 지나가는 중 덕명(德明)을 만났다.
그 스님은 일찍이 풍악산 구경을 하여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 다. 늦게야 양주읍(楊州邑)에 도착하여 외삼촌은 양주 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 있 었는데, 양주 목사 이원정(李元禎)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군 여 거(柳君汝居)-이름은 광선(光善)가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삼촌을 통해 와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 당(序堂)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正字) 담명(聃命)이 찾아왔고 주좌(州佐) 인 우(禹)와 한(韓)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25일(무술) 맑음. 양주 목사 부자(父子)가 또 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무성(蕪城) 고개를 넘어 감악산(紺嶽山)을 바라보고 가면서 유군(柳君)과 함께 홍복(弘福)、고령(高靈)、도 봉(道峯)、불암(佛巖) 등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입암(笠巖) 율정(栗亭) 아래서 말에 꼴을 먹인 후 일행과는 일단 갈라섰다. 나는 송형 석우 계신(宋兄錫祐季愼)이 살던 곳을 묻고 송군 욱(宋君澳)의 초당에 들렀더니 매화나 무, 대나무는 옛날 그대로이고 벽에는 내가 몇 해 전에 써 준 기문(記文)과 허장 미수(許 丈眉叟)가 쓰신 기信己)가 걸려 있어 읽어보니 지난날의 회포가 일어 눈물이 글썽했다.
송군 제(宋君濟) 부자를 다 조문하고 일행을 뒤쫓아 간파령(干波嶺) 아래서 만났다. 차근연 (差斤淵)을 건너서는 유군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 가다가 저물어 신릉(新陵) 정극가(鄭克 家) 산장에 당도하여 함께 잤는데, 자해(紫蟹) 홍주(紅酒)를 마시며 서로 흔쾌하게 보냈다.
26일(기해) 맑음. 정극가와 출발은 함께 했으나 길이 달랐다. 나는 진수동(眞樹洞)으로 이 참봉 언무 경윤(李參奉彦茂景允)을 찾아가서 그의 세 아들 태양(泰陽)、태징(泰徵)、 태륭(泰隆)과 윤세필(尹生世弼)을 만나 보았다.
윤생은 이 참봉의 이모 아들로 우리 남원(南原) 윤씨라고 하였다. 이생 태양이 나를 따 라왔다. 군영동(群英洞)에 이르러 허미수(許眉叟) 어른을 뵈었는데 일행들은 먼저 와 있었고, 미수 어른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허생 함(許生)、송생 직(宋生溭), 정생 태악(鄭生 泰岳)을 만났다. 미수 어른은 서실로 나가고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 는데 초가집에 온갖 화초가 그윽한 정취를 풍겼다.
미수 어른이 두류산(頭流山), 오대산(五臺山), 태백산(太白山) 등의 기록과 정허암전(鄭 虛菴傳)、답자대부상서(答子代父喪書)를 꺼내 보여 주기에 나는 일찍이 지은 선계설(禪 繼說)로 답하였다.
또 짐 꾸러미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아 몇 순배 대작한 후 섬돌 위에 있는 일월석(日月 石)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석경(石鏡)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해와 달 그림자가 석면에 훤히 비쳤으며 미수 어른이 손수 그 세 글자를 조각했다고 한다. 얘기 도중 길을 떠나는 정표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허락하고 또 전서(篆書)로 광풍제월(光風 霽月) 낙천안토(樂天安土) 수명안분(受命安分) 이렇게 열두 자를 써 주어 유군과 나눴는 데 유군은 수명(受命) 이하 네 글자를 차지했다. 늦어서야 하직하고 출발했는데 외삼촌 이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길이 이것뿐인데다 관가(官家)로부터의 요구에 책임을 지고 응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죽음이 앞에 닥쳐올 것을 알고서도 별 수 없이 해 야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하였다.
이 날 어부가 새로 따온 전복과 대구(大口)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전복은 회치고 대구는 삶고, 또 막걸리까지 사다가 즐기었다. 달 놀이를 마치고 정사(亭舍)로 돌아와 자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두 군으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아침 해가 먼지 한 점 없더니 旭日氛埃滅
가을바람에 큰 파도 이네 秋風大海波
태산에도 오르는 기분으로 還將登岱興
다시 달 가의 뗏목에 오르네 更上月邊槎
양양(襄陽) 주수가 관인(官人)을 시켜 우리 일행을 탐문하였다.
13일(을묘) 새벽에 일어나 일출 광경을 보았더니 구름이 가리고 있었으나 구름과 해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황금빛이 내리 쏘이고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매우 좋았다. 길 중간에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대의 크기는 모두 화살 감이었으며 바다 속의 섬들도 모두 푸르른 대숲으로 되어 있었다.
노포(蘆浦)에 와서는 호수가 터져 건널 수가 없어서 뱃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배를 끌 어다가 건너게 하였다. 내가 보기에 동해에 있는 배들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위 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이 마치 말구유 모양이고 몸통도 매우 적은데 그래야 배가 파도 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큰 배 한 척을 보았는데 모양이 서해(西海)에서 부리는 배 같았고 모래 위에 정지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 말이 동해에는 그렇게 생긴 배가 없고 지난 큰 흉년 때 영남(嶺南) 백성들이 살 길이 없자, 그 배로 고기 잡고 해초라도 캐기 위해 파도를 무릅쓰고 동해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들은 동해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활 을 꾸려가자는 속셈이었다. 파도에도 역시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하였다. 내 그들 말을 듣 고 생각해 보았을 때 동해의 작은 배들은 그것이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 쓰기 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지만 저 큰 파도는 큰 배가 아니고서는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동해에는 파도가 거세지 않다 하여 관(官)의 힘으로 큰 배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에는 큰 배가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지난 흉년 때 들어왔다는 저 배를 놓고 보더라도 동해、서해를 배로 통행할 수 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그날은 또 염막(鹽幕)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방법을 들어가서 보았는데 바닷물을 달여 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서해와 다르고 소금 맛도 너무 써서 음식을 만들면 달고 맛 있는 서해 소금보다 훨씬 못하였다. 서해안의 소금 만드는 방법을 동해안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또 따뜻한 날씨에 동남풍이 불어 바닷물이 잔잔한데 가끔 고래가 나와 노는 모 습이 보였다.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면 눈발 같았으며 소리는 소 울음소리 같았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고기로는 고래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다. 그러나 또 황수차(黃水差)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서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고래 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황수차는 꼭 떼를 지어 다니다가 만약 고래를 만나게 되면 수컷 하나가 지휘자로 뒤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번갈아서 나가게 하여 꼭 죽 여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종류별로 서로 제어를 하고 또 싸우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니 그 역시 자연 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20여 리를 더 가 건봉(乾鳳) 하류를 건너 낙산(洛山)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산등성이로 올라 얼마를 더 가서 절 문간에 들어서니 스님들이 견여 를 메고 나와 맞이했다. 견여를 물리치고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올라 앉아 있었다. 정 자는 절 문간 밖에 있었는데, 그 절의 문정(門庭)이나 헌각(軒閣)이 웅장하여 바로 하나 의 큰 아문(衙門)이었다. 절은 설악산을 등진 채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세가 편평 하며 넓고 건물도 탁 틔어 넓었다. 당(堂)에 올라 보니, 금벽(金碧) 장식이나 용마루 등의 높이는 비록 장안사、유점사 등만 못해도 대문과 담의 꾸밈새나 전망이 좋기는 그 두 절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양양 태수 이대옥(李大玉)이 온다는 시간에 오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린 뒤에 왔기 때문 에 우리들이 옛날 산당(山堂)에서 있었던 일처럼 스님들로 하여금 북을 울리게 하여 그 가 시간에 대어 오지 못한 것을 장난삼아 책하고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는데 대옥이 술과 안주를 차려가지고 와 함께 마시며 즐겼다. 얘기 도중 극가가 말하기를, “고 성 태수(高城太守)는 이 좋은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서, 천리 멀리 구경 나온 서울의 사 우(士友)들을 만났는데도 서로 위로하는 술 한 잔도 없으니 그 어디 풍류 있는 태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 일은 배울 일이 아닙니다.” 하자, 외삼촌 이 말씀하기를, “고성 태수는 천성이 원래 깔끔해서 애당초 그 생각을 않은 것뿐이지 정 의가 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네.”하였다.
내가 뒤이어 말하기를, “자신이 깔끔하기 때문에 남을 대우하는 것도 냉랭하게 하는 것 이 물론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주식(酒食)에 빠져 그칠 줄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훨씬 더 고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야 술 속의 취미도 알아서 사람을 운치 있게 대우하는 것이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야 마치 기와조각을 물 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고 차분할 때가 없는 것인데 남이 무슨 취미 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이며, 또 그런 분과 어떻게 호산(湖山)의 승경을 논할 만 하겠습니까.”하였다.
그때 좌중에 술을 마시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서로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한잔씩 들고는 밤이 깊어 파하고 함께 선당(禪堂)에서 잤다.
내가 시 한 수를 읊어 대옥에게 주니 대옥도 화답하였다.
설악산 구름이 삼천 길이나 드리워져
구만 리 먼 동해에서 달이 솟네
오늘 이화정 위의 가진 이 모임이
아양곡 한가락은 벗의 마음이구나
雲垂雪嶽三千丈
月湧東溟九萬尋
今日梨花亭上會
峩洋一曲故人心
이상은 내 시인데, 그날따라 하늘이 비가 내릴 듯 설악산 절반을 구름이 가리고 있었고 달이 중천에 오르자 비로소 빛이 있었다. 또 좌중에는 현금(玄琴)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 었기에 시에서 이를 언급한 것이다. 대옥의 화답시다.
홀로 높은 대에 올라 신선세계를 바라보니
봉래섬 아득하여 어디서 찾는단말인
거문고에 실어보는 아양곡 한 가락에
두 사람 마주 앉은 백년의 마음
獨上高臺望仙子
蓬島微茫何處尋
惟有峩洋琴一曲
兩人相對百年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 멀리 이화정에
술을 들고 오르자 흥이 절로 나네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梨花亭迥海東傍
杯酒登臨引興長
誰道洛陽探勝客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 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 내가 좌중의 여러 사람들에 게 말하였다.
“꽃과 버들은 봄빛과는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풍류로는 그만이지만 그러나 초나라 군대 가 한왕(漢王)을 겹겹으로 에워싸는 날이면 빠져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을 어 쩌지?”
했더니, 대옥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기고 지고는 내 하기에 달린 것인데 가까이하면 어떤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한 나라 군대가 사면에서 모두 초가를 부르다가 그들이 요란스럽게 장막 아래까지 다 가오면 그때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가려 해도 안 될 것이니 내 아주 자리를 걷어가 지고 피하고 싶네.”
했더니, 모두들 웃으면서, 싸움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것은 속이 부족한 탓이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그것은 제군들이 안 보았을 뿐이지 병법(兵法)에 있는 말일세.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아 예 패배하지 않을 위치를 택하는 법이야.”
하고, 드디어 그 자리를 떴더니 유군 하는 말이,
“그대야말로 성문을 굳게 닫고 철저히 지키는 자로다.” 하였다. 외삼촌이 하신 말씀이,
“내가 자리를 바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께서는 노장이어서 모든 일에 익숙하시기 때문에 패배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서 서로 농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어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옛날 개서막(開西幕)에 부임해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뇌유령(雷有寧)이 바다를 통해 나오 기로 되어 있었는데, 기일이 오래 지나도 오지 않아 원접사(遠接使) 이하 여러 명승들이 모두 모여 20여 일간이나 머무르고 있었지. 그때 원접사는 김신국(金藎國)이었고, 구봉서 (具鳳瑞)、정태화(鄭太和)가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감사(監司) 장신(張紳), 병사(兵使) 유림(柳琳)이 좌음(佐飮)을 위해 남북의 기생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각기 20여 명의 예쁜 여인들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너도나도 못하는 짓이 없이 별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는 처음에는 돌아본 체도 아니 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가도 결국에는 별 수 없이 한통속이 된 사람도 있다. 그때 조경(趙絅)이 문례관(問禮官)으로 함께 있었 는데 그가 평소 청고(淸苦)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공들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그 중에서 예쁜 여인을 골라 조공을 꼭 품안에다 넣도록 당부를 했는데, 조공은 처음부터 난색 하나 보이지 않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날마다 앞에다 두고 부리 는 등 모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끝까지 지킬 것을 지켰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그 늙은 이의 지조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했다. 그 말끝에 일행 모두가 말하기를,
“그 늙은이를 혹 경멸하고 헐뜯는 자도 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단계가 높은 분이지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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