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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39. 낙산사(洛山寺)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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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고려 스님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 쪽 두어 마당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굴 앞에서 오십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 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 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情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위다 거기 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하였으며 용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나라 군 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 이 함락되자 절의 종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 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려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하였다. 명종(明宗) 정 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배례 하였더니 청조 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四十四,江原道襄陽都護府

     

    중생의 고통의 소리를 보고 구원의 손길을 뻗는 보살이라 하여 관세음(觀世音) 또는 관 음(觀音)보살이라 한다. 낙산의 원명은 보타락가산으로, 약해서 낙산이 됐다. 곧 낙산사 가 들어선 현장은 관세음보살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세계적인 성지다. 고려 스님 익 장(益莊)이 써 남긴 낙산사의 유래는 이렇다. 지금 의상대 맞은편 바다를 향한 암굴 속에 관세음보살이 사는데 신라의 의상(義湘) 대사가 그 굴 오십 보 앞 바닷물에 잠겼다 드러 났다 하는 암반에 두 이레를 앉아 관음의 모습을 보고자 기도를 했다. 끝내 드러내지 않 자 부덕을 자책,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보살이 용으로 하여금 앞발을 뻗게 해 구하고서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주면서 “내 몸은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 대나무 두 그루가 솟 아있는 곳이 내 정수리이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셔라” 했다. 그렇게 지은 절이 낙산사요 수정 염주와 여의주는 사보(寺寶)로 간직해 내려오는 동안 외난과 화재로부터 안전했다. 몽골 침략 때 절의 종이 이 두 보물을 땅에 묻어 보존했다는 것을 끝으로 행 방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