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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44. 낙산사제영 (洛山寺題詠) / 용재(慵齋) 성현(成假)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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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오봉 숲 기슭 모두 울창하여

    구름에 걸린 나무 침침하고 바다는 어둡네 

    감우(낙산사)에 홀연히 청정세계 열리고 

    부처님 미간에 나는 빛 대자비로 감쌌네 

    고기잡이 금하니 백성들 살길 없고 

    길가는 역졸은 먼 길 달리기 고달프다 

    애오라지 산나물과 다과(茶菓) 있으면 

    향기롭게 달게 여겨 배고픔 잊으리라

     

    五峰林麓鬱泰差 

    雲樹沉沈暗海湄 

    純宇忽開淸淨界 

    白毫光繞大慈悲 

    禁漁民戸無生理 

    移路鄭大苦遠馳 

    惟有山蔬與茶果 

    芳日亦可慰窮飢

     

    『江原道誌』

     

    성현(세종 21년, 1439년〜연산군 10년, 1504년)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경숙(磬叔), 호는 허백당(虛白堂),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국오(菊塢)이다. 세조 8년(1462년) 식년문과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가 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사록(司錄)이 되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대사간•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88년 평안도관찰사로 있 을 때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했 다. 62세 때는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에 올라 이 시기의 문풍을 실질적으로 주 도했다. 그의 시론의 특징은 이규보와 서거정의 기론(氣論)을 계승•발전시키는 한편 다양 한 미의식의 구현을 주장한 점이다. 또한 사회적 효용을 중시하는 각도에서 정치적 득실 에 대한 풍간(諷諫)의 작용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그의 애민시(愛民詩) 계열 작품의 이론 적 토대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다양하다. 『慵齋叢話』를 저술했으며, 장악 원의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한 『樂學軌範』을 유자광 등과 함께 편찬했다. 문집으로 『虛白堂集』이 전한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 당했으나, 뒤 에 신원(伸寃)되었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성현은 강원도관찰사와 대제학을 지냈고, 조선조 文風을 주도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로 낙산사를 찾아 오봉산은 숲으로 우거져 울창하지만 구름에 걸린 나무는 침침하고 바다 는 어둡다는 표현에서 작품의 내용을 예견할 수 있다. 낙산사는 청정의 세계가 열려 부 처님의 자비로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고기잡이를 금하여 백성들이 살아가기 어렵 고, 역졸들도 멀길 달리기에 고달픔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자신도 오로지 산나물과 다 과만 있어도 즐겁게 먹고 배고픔을 잊을 수 있다는 처참한 생활상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