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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47. 낙산사 향로봉에서(洛山寺香罏峯) /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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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무성했던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니 

    지는 해는 맑은 경치 펼쳤네 

    바람이 불어 맑은 거문고 울리고 

    높은 산 뾰쪽한데 맑고 흰 달이 작구나

     

    芸芸物歸根 

    落日展淸眺

     風進淨琴張 

    山尖白月小

     

    『秋江先生文集』卷之三,詩

     

    남효온(1454~1492년)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이다. 생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신(曺伸), 이윤종(李允宗), 주계정(朱溪正), 안응세(安應 世) 등과 사귀었다. 소릉 복위 주장은 세조 즉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의 명분을 간접적 으로 비판했던 것이었으므로 훈구파(勳舊派)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니는 유랑생활로 생을 마쳤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면서 세상일을 가볍게 여겼다. 사육신(死六臣)의 절의를 추모하고, 그들의 충절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六臣傳』을 저술하였다

    「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을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지목되었다. 1504년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 어나자, 소릉 복위를 상소했던 일이 다시 논죄되었다. 고양에 있던 그의 묘가 파헤쳐지 고 시체는 양화도(楊花渡) 나룻가에 버려졌으며, 아들 충서(忠恕)도 사형 당했다. 숙종 대에 이르러 함안 백이산(伯夷山) 밑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을 세워 원호(元昊)•이맹전(李 孟專)•김시습•조여(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이들을 생육신이라 일 컫는다. 정조 6년(1782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추강집』•『秋江冷話』•『師 友明行錄』•『귀신론』•『육신전』등이 있다. 고양 문봉서원(文峰書院)•장흥 예양서원(讷 陽書院)•영월 창절사(彰節祠)•의령 향사(鄕祠)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