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익현 유사군에게 받들어 화답하며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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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현 유사군에게 받들어 화답하며
(奉和翼山見柳使君)
관동지방에서 아름다운 곳은 양주를 말하니
더구나 백성 순박하고 풍년까지 들었음에랴
영각의 금서를 보니 참으로 어진 태수요
바닷가의 부절은 바로 옛날의 제후라네
남 따라 굳이 안렴사를 높일 것도 없거니와
허리는 굽혀서 어찌 관리에게 향하리오
조만간 정히 성상의 부름을 받으면
옛날의 장조와 누가 더 우월할런고
關東佳麗說襄州
況復民淳歲有秋
鈴閣琴書賢太守
海圻符竹古諸侯
雷同未必尊廉使
磬折何曾向督郵
早晩定膺宣室召
往圖張趙孰爲優
과거에 장원하고 십육 년이 되기 전에
창해군 동쪽 가로 장관이 되어 갔네
풍속 교화한 예악의 정사를 모두 흠모하는데
조세 독촉으로 결박당한 흉터를 누가 탄식하랴
관리 차림에 대궐 출입 막힌 게 싫을 터인데
운하 속에서 어찌 신선술을 배우리오
주옥같은 장편시가 풍편으로 인해 당도하여
한번 읽으니 백발을 물리칠 만하구려
桂籍魁仙未破瓜
爲官滄海郡東涯
共歆化俗絃歌政
誰嘆催科木索痂
冠佩應嫌阻靑瑣
雲霞寧學養丹砂
驪珠百十因風墮
一讀猶堪却鬢華
『佔畢齋集』卷之二十二,奉和翼覘柳使君
김종직(14317492년)의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길재의 문하에서 문 장을 배웠다. 6살 때부터 부친에게서 童蒙須知 小學, 四書三經, 諸子百家書 등 폭넓은 문 장을 배웠다. 세조 5년(145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종 초에 함양군수, 선산부사를 거쳐 도승지, 이조참판,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의 문하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 많은 제자를 교육하였다. 27 세에 쓴 弔義帝文를 지어 무오사화로 인해 剖棺斬屍되었다. 연산군 4년(1498년) 제자 김 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 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 (懷王 : 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 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이황은 김종직을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 우리나라 학문의 연원이 깊도록 하였으며 문장 이 高古하여 시대의 領袖이며 후생을 일깨운 태산북두가 되어 유학의 도가 끊이지 않게 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숙종 15년(1689년) 영의정에 증직되고, 숙종 34년(1708년) 문 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밀양의 예림서원, 선산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에 제향 되어 있다. 저저는 『佔畢齋集』, 『流頭流錄』, 『靑丘風雅』, 『堂後日記』등이 있다.
이 시는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답한 것으로, 유부사는 I486년 양양부사로 재임 하면서 실록에 의하면 의창(義倉)의 문제에 따른 폐단을 상소하여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 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사망했다.
관동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양양으로, 백성들이 순박하고 문물이 풍부한 고을에 서 선정을 베풀어 좋은 태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진나라 도잠의 고사와 명망이 높았
던 장조(장참, 조광한)의 고사를 인용하여 유사군에게 어진 태수의 모습을 강조 하고 있 다. 유부사는 어진 부사로 왕의 부름을 받으면 충성된 신하로서 존경받을 만하다고 하 고, 양양의 부사로 부임하여 풍속교화와 예약에 힘써 모든 백성들이 흠모하기를 부탁하 며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부사의 아름다운 시는 한번 읽으면 백발을 물리칠 만큼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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