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영동에 안찰사로 가는 황숙공을 보내며 4수 / 용재(容齋) 이행(李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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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에 안찰사로 가는 황숙공을 보내며 4수
(送黃叔貢按察嶺東四首)
고삐를 잡고 영동으로 나가며
구름을 보고 북당을 생각하리
융숭한 성은 근친을 허락하니
색동옷에 은장이 어려 비치도다
왕사에 어찌 쉴 겨를 있으랴만
차마 어버이 상심케 할 수 없어라
징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명하여 다시금 술잔 올리누나
攬轡出東道
望雲懷北堂
殊愿詐榮覲
彩服映銀章
王事寧遑息
親慈未忍傷
徵黃無幾日
拜命更稱觴
평생에 흠모하는 벗 황숙도는
문장이 한나라 작가에 필적하지
이제 또 동문의 이별을 하니
북수의 정을 장차 어이 견딜꼬
밭의 외는 하마 딸 때가 되고
강의 잉어는 때로 삶을 만하리
이 늙은이 시를 적어둔 곳으로
월정을 평소에 늘 기억하노라
平生黃叔度
文字漢西京
又作東門別
那堪北樹情
園瓜期且摘
江鯉可時烹
老子題詩處
尋常記月精
월정(月精)은 절 이름이다.(月精 寺名)
지난날 장맛비를 만났을 적
한 가닥 길에서 각자 엇갈렸지
세상일이란 참으로 우스운 것
덧없는 인생 만날 기약 없어라
서로 만났다가 다시 이별하고
술잔 잡고 한편 시를 논하누나
낙산사에 의춘의 시축이 있으니
한가한 틈에 설미를 찾아보시라
往時遭雨潦
一路各差池
世事眞堪笑
浮生未有期
相逢還作別
把酒且論詩
洛寺宜春軸
乘閑問雪眉
낙산사(洛山寺)의 중 설미(雪眉)가眉)정 상공(止亭相公)의 시를 얻어 시축을 만들었기 때 문에 이렇게眉말하였다.
(洛山寺僧雪眉 得止亭相公詩爲軸 故云)
경치 좋기로 동해가 이름났나니
노쇠한 몸 젊어 놀던 때 추억노라
대평에서는 술 깨어 말을 달렸고
경포에서는 술 취해 누대에 올랐지
개골산 못 가본 게 한으로 남건만
이내 생애 이미 늙어 백발이로세
이 푸른 봄날 그대를 보내노니
마음대로 신선의 산을 찾아보오
勝絕傳東海
衰遲憶壯遊
臺坪醒走馬
鏡浦醉登樓
遺恨乖皆骨
餘生已白頭
靑春謝吾子
隨意訪丹丘
『容齋先生集』卷之二,五言律
이행(1478(성종 9)~1534(중종 29)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叟)•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박은과 함께 해동의 강서파〈江西派)라 고 불렸다. 연산군 1년(1495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전적을 역임했고, 『성종실록』편찬에도 참여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고,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교리에 등용, 대사간대사 성을 거쳐 대사헌•대제학•공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펴내는 데 참여했고, 1531년 김안로를 논박하여 좌천된 뒤 이듬 해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당시(唐詩)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발한 착상과 참신 한 표현을 강조하는 기교적인 시를 써서 새로운 시풍을 일으켰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고, 1537년 신원(伸寃)되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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