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제동낙산동헌(題東洛山東軒) / 청허당(淸虛堂) 석 휴정(釋 休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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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산 티끌에 휩쓸려 분주히 달리니 塵漲蹄輪忙裏走
주색에 미친 마음 밤낮이 없네 心狂酒色夜中行
어찌 타락한 모습으로 누우리오 豈如破衲蒙頭臥
동창에는 바다의 새해가 뜨는구나 直至東窓海日生
『金剛山詩集』下篇
휴정(중종 15년, 1520년~선조 37년, 1604년)은 속명은 최여신(崔汝信)이고 본관은 완산 (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 (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휴정은 법명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 어나 서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잉고 격문을 보내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의 榆岾寺)고 탑이 세워졌으며, 해남 표충의 表忠祠)와 밀) 와표충의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 되었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마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중종 35년(1540년)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명종 4년 (1549년)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 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 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 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 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 淸虛 堂集』이 있다.
이 시는 휴정이 낙산에서 묵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감회를 표현하였다. 휴정은 임진왜 란과 모반의 혐의, 그리고 불교와 관계없는 속세의 일들에 중심을 잃고 생활하기도 하였 다. 그리고 조선조 불교의 중심에서 속세의 일에 분주히 많은 일들을 하며 때로는 속세와 의 인연으로 청정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속세의 욕망과 허무함을 표현하였다. 낙산 사는 불교의 성지로 이곳을 찾아 선대 고승들을 생각하며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 였고, 새롭게 뜨는 해를 보며 마음을 새롭게 잡고 자신을 찾으려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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