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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蘘陽의 漢詩

    102. 기행(紀行)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페이지 정보

    조회 21회

    본문

    쫓겨난 이 신하 대죄하던 곳 

    대동강 동쪽 외진 마을이었지 

    당시 풍파가 창졸간에 일어나 

    화란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죽음 못 면하리라 다들 말했지만 

    성상께서 통촉하시리 나는 믿었네 

    하해 같은 은혜로 목숨 보전하여

     

    孤臣昔竢罪 

    浿水東村僻 

    風波起倉卒 

    禍機將不測 

    人言死難免 

    我恃天鑑燭 

    鴻恩荷曲全

     

    외진 이곳 영해로 귀양 왔었지

    찢어진 옷 어깨와 팔꿈치 드러나고

    행낭 자루엔 남은 곡식이 없었네

    금오랑이 길 떠나라 재촉해대니

    잠시인들 지체할 수 없었다오

    사위인 이랑이 나를 좇아와서

    갈림길에서 비통한 이별할 제

    어디로 갈거나 말은 못 하고서

    서로 부여잡고 길 위에서 울었지

    저물녘에 상원촌에 들어서니

    나무 그늘에 숨은 오두막이었네

    수안 길에선 진흙탕에 빠지고

    신계협에선 더위에 시달렸지

    주인은 나를 후하게 대접하여

    술을 내고 쟁반에 어육을 담아와서

    유락하는 신세 은근히 위로해 주니

    반기는 눈빛 참으로 막역지우였네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안협촌

    가는 길은 강 따라 굽이굽이 꺾였지

    둘째 딸아이가 장인을 따라

    난리 피하여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나를 보고 울며 잠시만 머물라 애원했네

    그러나 메조밥이 채 익기도 전에

    옷깃 떨치고 떠나 돌아보지 않으니

    부녀간의 은정 칼로 자르듯 아팠네

    이천에서는 늙은 종을 만났는데

    우리 열 식구 깊은 골짝에 숨어 있었지

    늙은 아내는 작별이나 할 양으로

    나를 기다리며 길가에 서 있었건만

    뿌리치고 말을 채찍하여 지나가니

    어느 새 운산을 넘어 아득히 멀어졌네

    밤중에 평강현을 지날 적에는

    달도 없는 어둠 속 부엉이가 울었지

     

    嶺表賜譴謫

    破衣露肩肘

    行橐無餘粟

    金吾催登途

    頃刻留不得

    李郎追我來

    慘慘臨岐別

    訒之自何方

    相扶路上泣

    暮投祥原村

    樹底藏蝸屋

    衝泥遂安路

    觸熱新溪峽

    主人遇我厚

    杯盤盛魚肉

    慇勤慰流落

    靑眼眞莫逆

    窈窕安峽村

    緣江路百折

    仲女隨舅翁

    避亂依林樾 

    啼呼願少留

    糲飯炊未熟

    拂衣去不顧

    恩情如斷割

    伊川逢老僕

    十口竄深谷

    老妻欲相訣

    待我立路側

    麾之策馬過

    已覺雲山隔

    夜過平康縣

    月黑鵂鶹哭

     

    금화촌에서는 비에 막혀 머물렀는데 

    시냇물이 깊어 말의 배까지 차올랐네 

    사위 유랑은 어린 딸을 데리고서 

    양식을 싸들고 산 넘고 물 건너와 

    낡은 이불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눈물과 함께 길 떠나는 내게 주었지 

    가고 또 가서 낭천을 지나노라니 

    산이 깊어 범 발자국이 많았네 

    양구와 인제 두 고을의 태수는 

    옛적부터 교분이 있어온 터라 

    말술을 나에게 마시라 권하매 

    그 깊은 정 뱃속에서 우러나왔지 

    동쪽으로 한계산을 바라보니 

    빽빽이 세운 창칼처럼 높은 봉우리들 

    저물녘에 산 아래 역참에 묵노라니 

    구름과 산 기운에 잠자리가 눅눅했지 

    새벽녘에 미파령 잿마루를 오르니 

    동해 바다가 몸 굽히면 잡힐 듯 

    층암절벽에 말발굽이 미끄러져 

    열 걸음에 예사로 아홉 번 넘어졌지 

    미파령을 내려와 원암에 당도하니 

    세 가닥 장대 높이로 해가 기울기에 

    황혼에 낙산사로 가서 투숙하는데 

    절간 밥상이라 죽순과 나물이 섞였지 

    늙은 중이 나를 불러 깨우더니만 

    새벽 창으로 일출 광경 보라 하네 

    평소에 꿈에서나 그리던 곳인데 

    하룻밤 묵으니 참으로 절승이었지 

    해가 뜰 무렵 멀리 현산을 바라보니 

    안개 낀 수림이 빽빽이 둘러 있었지 

    짧은 노를 저어 강어귀를 내려오니 

    외로운 성에서 뿔피리 소리 들리었네 

    쓸쓸한 고을이라 동산현에는


    滯雨金化村   

    溪深過馬膓

    柳郎偕弱女   

    嬴粮勤跋涉

    携來一幣衾 

    和淚贈行役 

    行行過狼川 

    山深多虎跡 

    楊麟兩太守 

    分義自疇昔 

    斗酒勸我飮 

    深情出肝膈 

    東望寒溪山 

    嵯峨森劎戟 

    暮宿山下驛 

    雲嵐濕枕席 

    曉登彌坡嶺 

    東溟俯可挹 

    層崖馬蹄滑 

    十步恒九蹶 

    下嶺到元巖 

    三竿日已夕 

    黃昏投洛山 

    僧盤雜筍蔌 

    老衲呼我起 

    曉窓看日出 

    平生夢想地 

    一宿眞勝絕 

    平明望峴山 

    煙樹圍簇簇 

    短棹下江口 

    孤城聽吹角 

    蕭條洞山縣

     

    낙봉의 시가 벽에 걸려 있었지

    명사십리 백사장엔 해당화 향기롭고

    경포대 호숫가에는 찬 솔이 푸르렀네

    임영은 예로부터 이름난 지역이라

    산수도 좋거니와 좋은 유적 많아라

    말 위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던가

    노정을 다잡아 번갯불처럼 치달렸네

    갖은 고생을 겪고 율령재를 넘으니

    화현 고개가 또 우뚝이 서 있었지

    험한 길을 빠져나와 평원을 지나

    진주성 밖에 다달아 유숙하였더니

    수령이 추위에 떠는 날 불쌍히 여겨

    솜을 넣은 도포를 입으라 주고는

    조각배로 나를 전송해 준 그 온정

    담수는 깊고 깊어 천 척이었네

    높고 높은 소공대에서는

    멀리 울릉도가 역력히 보였고

    울진이라 독송정에서는

    여윈 말 매어놓고 여물을 먹였지

    망양정에서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니

    하늘과 물 푸른빛이 서로 엉겼어라

    이에 흉금 어느 새 후련히 트이어

    시름도 즐거움도 죄다 던져버렸지

    월송정 객점에서 안장을 풀고 쉬는데

    머리를 쳐드니 머리가 천정에 부딪쳤네

    의연히 내 고향 집에 돌아온 듯하니

    분수를 헤아림에 만족할 줄 알겠더라

    야밤에 치달려 온 화급한 통문을 보니

    승냥이 같은 도적떼가 가득 몰려온다네

    이름 없이 헛되이 죽는 게 부끄러웠지

    이내 목숨이 아까운 건 아니었다오

    창황히 서둘러 뒤 고개를 넘어가면서

    한 달이라 삼십 일 동안 기갈을 참았네

     

    駱峯詩掛壁

    鳴沙海棠香

    鏡浦寒松綠

    臨瀛古名區

    山水多勝躅

    馬上幾回首

    嚴程若電掣

    間關踰栗嶺

    火峴又突兀

    脫險度平曠

    眞珠城外宿

    使君憐我寒

    綈袍縫密密

    扁舟送我情

    潭水深千尺

    崔嵬召公臺

    蔚陵看歷歷

    仙槎獨松亭

    瘦馬留一秣

    望洋臨縹緲

    天水相涵碧

    胸襟覺浩浩

    憂樂盡抛擲

    卸鞍越松店

    擧頭頭打屋

    依然返桑梓

    揆分庶知足

    羽書半夜馳

    豺狼急充斥

    —死愧無名

    軀命非所惜

    蒼黃踰後嶺

    三旬忍飢渴

     

    적이 지나간 뒤에 처소로 돌아와보니

    소슬한 가을바람이 이미 불더라

    나의 두 자식과 그 어미인 아내가

    지친 모습으로 이곳 해변을 찾아왔지

    만 번 죽을 위험 끝에 홀연히 상봉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알기 어려웠네

    황보촌에서 귀양 사는 삼 년 동안에

    골육 친지 반나마 영락했으니

    슬퍼해도 소용없음이야 익히 알지만

    쇠잔한 머리 날로 흰 터럭이 늘었지

    광음은 절로 하염없이 흘러가고

    한서는 수레바퀴통처럼 빨리 바뀌니

    눈길 닿는 곳마다 마음이 언짢아서

    때때로 흥건히 흐르는 눈물을 닦았지

    어찌 객지살이 괴로움 때문이랴

    대궐을 연모하느라 창자가 찢어졌네

    의주의 물굽이는 오열하며 흐르고

    대동강에 뜬 달도 빛이 처량하리

    아득한 행궁은 어디에 있는가

    소식을 전할 길은 전혀 없구나

    어저께 저녁 고을 사람이 전갈하길

    임금 수레가 도성으로 돌아왔다기에

    근심 중 이렇게 반가운 소식 들으니

    황홀한 마음을 형언하기 어려워라

    천심도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는가봐

    적의 형세가 절로 무너져 움츠리네

    난세와 치세는 본래 서로 이어지니

    삼한 땅이 앞으론 평안해지리라

    이제부턴 모쪼록 밥이나 많이 먹어

    해골이 산야에 버려짐이나 면해야지

    군자는 이치대로 살아감을 중시하나니

    곤궁함 속에서도 오히려 자득한다네

    범인들은 그저 이해득실만 중시하여

     

    賊過還僑舍

    秋風已蕭瑟

    兩兒與母妻

    纍纍尋海曲

    萬死忽相逢

    眞夢未易識

    三年黃保里

    骨肉半零落

    自知無益悲

    衰鬓日添白

    光陰自荏苒

    寒署如轉轂

    觸目懷作惡

    時時淚盈掬

    豈緣羈旅苦

    戀闕腹欲裂

    嗚咽龍灣水

    凄凉大同月

    行宮杳何處

    魚鴈亦難達

    昨暮邑人傳

    車駕旋故國

    憂中聞吉語

    惝怳難容說

    天心應悔禍

    賊勢自崩蹙

    否泰本相仍

    三韓將妥怙

    從今但加餐

    骸骨免塡壑

    君子貴理潰

    窮阨猶自得

    衆人重得喪

     

    심화를 태우며 자신을 들볶아대지 

    내 이제 고인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어찌하여 길이 소인마냥 근심하는가 

    돈이 생기면 곧바로 술을 사먹고 

    미친 노래 불러 울적한 회포나 풀리라

     

    膏火相煎爍 

    我今師古人 

    胡爲長戚戚 

    有錢卽沽酒 

    狂歌暢幽鬱

     

    『鵝溪遺槀』 卷之二,箕城錄,詩,紀行

     

    이산해(중종 34년, 1539년~광해군 1년, 1609년)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여수(汝 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산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산해관(山海關)에서 그의 잉태를 꿈꾸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어려서 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菌)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장안의 명 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 기도 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보령으로 이주했다. 명종 16년(1561 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조정랑•직제학•동부승지•대사성도승 지 등을 지냈다. 선조 11년(1578년) 대사간으로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어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지냈다 1588년 우의 정이 되었는데, 이무렵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했 다. 158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1591년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정철 (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다. 대북파의 영수 로서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선조 대 문장8대가의 한씨를 으로 불렸다. 김시습(金時習)의 문집 서문을 썼으며, 평해 유배시절에는 수많은 시문을 지었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