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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蘘陽의 漢詩

    109. 정시회 행장 - 상촌(象村) 신흠(申欽) / 한글 번역 -1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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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정시회(鄭時晦)의 행장은 상촌(象村) 신흠(申欽) 썼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성은 정(鄭), 휘는 엽(曄), 자는 시회(時晦), 호는 설촌(雪村), 또 다른 호는 수몽(守 夢)인데 초계인(草溪人)이다. 6대조 발(發)은 벼슬이 지중추부사이다. 증조 희년(熙年)은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조 선(璇)은 감찰(監察)에 추증되었으며, 고 유성(惟誠)은 진사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3대에 은전을 추 급한 것은 모두 공의 귀(貴)로 인한 것이다. 모(母)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정경부인에 추 봉되었는데, 찬성에 추증된 언태(彦台)의 딸이다. 윤씨 부인이 어떤 이인(異人)이 채작 (綵鵲)을 주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가정(嘉靖) 계해년(1563년, 명종 18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나서부터 풍채와 재기가 뛰어나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3세 때에는 글자를 능히 읽었다. 이때 모부인에게 혈질(血疾)이 있었는데, 의원이 황구(黃狗)로 소주(燒酒)를 내려 쓰면 좋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때 공이 곁에서 이 말을 듣고 뒤에 유모를 따라 길에 나갔다가 황구를 보고는 유모에게 말하기를 “네가 저 개의 주인이 누군지 물어 보 지 않겠느냐.” 하자, 유모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그 개를 사서 어머니 병에 약으로 쓰려고 한다.” 하므로, 듣는 이들이 공을 기특하게 여겼다.

    4세 때에는 남의 집 문희연(聞喜宴)에 가 구경을 하는데,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공을 눈여겨보고 누구의 아이냐고 물어 보고 는 공을 불러 “네가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면서 글을 외어 보게 하자, 공이 묻는 대로 착오 없이 척척 외니, 온 좌중이 몹시 감탄하였다. 참판 최옹(崔顒)은 공의 이웃에 살았 는데, 그 역시 이르기를 “이 아이는 틀림없이 재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학문에 더욱 힘썼고, 판서 이산보(李山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판서의 숙부 지함(之菡

    )은 세상에서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라 일컬어진 분으로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고 지 인지감이 있었는바, 공의 뛰어난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후일에 반드시 큰 명 예를 독점할 것이다.” 하였다.

    16세 때에는 향해(鄕解)에 선발되어 화려한 명예가 마침내 드러났다. 이어 율곡(栗谷)• 우계(牛溪) 두 선생의 문하에 가서 학업을 받았고, 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종 유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어 호강한 기습을 제거하 고, 단정하고 엄숙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함께 사귀는 사람은 모두 한 시대의 명사들 이었는데, 도의로써 서로 절차탁마하여 기거(起居)와 어묵(語黙)에 모두 법도가 있었다.

    만력(萬曆) 계미년에 처음 벼슬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에 보임되었다가 홍문록 (弘文錄)에 뽑히니, 명망이 매우 성대하였다. 이해 겨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 치도록 집상(執喪)을 하였다. 그래서 몸이 아파도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잠을 잘 때도 옷을 벗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제전(祭奠)을 드릴 때는 손수 칼과 도마를 잡아 제수 를 갖추었다. 이렇게 하여 여름을 지나다 보니, 등살이 다 문드러지고 두 눈은 눈물을 많이 흘림으로 인해 가리는 것이 생기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모부인께 걱정 을 끼치게 될까 염려하여 그 사실을 숨기고 고(告)하지 않았는데, 달포 뒤에 공의 선인 (先人)이 모부인의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우리 아이가 곧 실명(失明)을 하게 되었는데, 왜 방치해 두고 구원하지 않는가.” 하므로, 그제야 모부인이 깜짝 놀라 비로소 약을 써 서 그것을 완치시켰다. 복(服)을 마치고는 순서에 따라 정자(正字) ' 저작(著作)、박사〈博 士)에 승진하였다. 정해년에는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무자년에는 모친 봉양을 위하여 김포 현감(金浦縣監)으로 나가서 청렴하고 간솔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이때 부평(富平)에 사는 한 백성이 원가(怨家)가 있었는바, 그 원가 사람을 사죄(死罪)로 몰아넣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한 구를 남몰래 입수해 가지고 이를 원가의 자식이 제 종을 죽인 것인양 속여서 관에 고발하였다. 그러자 관찰사가 공 에게 그 옥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뭇사람들이 모두 이 자식이 사람을 죽였음에 의심 할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공만은 이 옥사에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 중 말로 연좌된 미결 수 하나가 있어 스스로 진술하기를 “나는 모역을 한 것이 아니요, 주인집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거짓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멀리 도망가 있다가 이번 일로 잡혀온 것입니다.” 하 였다. 그러자 선조가 명하여 그의 주인집을 조사해본 결과, 그가 바로 원가를 무고한 그 부평 백성의 종이었다. 이로 인해 그 부평 백성의 옥사가 제대로 처리되었다. 그 후 어 버이 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역적 정여립의 변으로 높은 벼슬아치들이 마구 연 좌 처벌되자, 공은 문을 굳게 닫아 내빈을 거절하고서 항상 옥사 다스리는 것이 정도에 지나침을 걱정하였다. 이어 형조、공조의 낭관에 옮겨졌다.

    신묘년에는 조모의 상을 당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었다. 임진년에는 왜란을 만나 대 부인을 모시고 호서에 우거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더욱 독실히 학문을 연구하 였다. 갑오년에 상제(喪制)가 끝나자 홍문관 수찬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왔다.

    이때 묘당(廟堂)에 왜적과 강화(講和)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 廷馣)도 소장을 올려 강화하기를 청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불가함을 굳게 쟁론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총독(總督) 고양겸(顧養謙)이 참장(參將) 호택(湖澤)을 보내어 우리 나라 를 왜적과 강화하라고 협박하자,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상의 앞에 나아가 의견을 아뢰 기를 “다만 천조(天朝) 장관(將官)의 말을 빙자하여 천조에 주문(奏聞)할 것이요, 강화를 청한다고 드러내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강화를 하고 안 하 고 간에 의당 그 이해를 분명하게 가려서 솔직하게 청해야지, 군신(君臣)의 사이에 어찌 두 가지로 말을 해서 되겠습니까. 유성룡의 말은 명백하지 못합니다.” 하고, 인하여 화의 를 준절히 배척하니, 선조가 이르기를 “이러한 유자(儒者)의 논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당시 남쪽 변경에서 올라온 치보(馳報)에 봉함(封緘)을 뜯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어떤 농간이 있는가 의심하여 공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해서 일로(一路)를 조사하도록 하 였다. 그런데 공이 그곳에 가 보았으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므로, 농간을 부린 자는 찾아 내지도 못하고 백성들만 소요시킬까 두려워하여, 상께 아뢰어 이 일을 작파하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충직함 때문에 시속 사람들에게 해독을 받아왔는데, 그가 이미 죽은 뒤에도 당로자(當路者)에게 씹혔는바, 당로자가 그의 관작을 추탈하려고 하나 공이 옥당(玉堂)에 있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공을 무함하기를 “정 모(鄭某)가 장차 상의 앞에서 정철의 관작 추탈하자는 논의를 막을 것이다.” 하고는, 먼 저 공을 공격하여 제거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곧 해면되었다.

    을미년에는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나갔다가 방백에게 거슬리어 파면되자, 군민들이 성 문을 닫고 못 가게 가로막았으며, 송덕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병신년에는 예조 정랑으 로 고급사(告急使)에 임명되어 명 나라 밀운(密雲)의 군문(軍門)에 가서 원병(援兵)을 청 하고 돌아와 성균관 사성을 거쳐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수원은 서울 근교의 산읍(山邑)인데다 또 삼도(三道)의 큰 길에 위치하였고 막 병화를 겪은 상태라서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텅 비었는데, 명 나라의 대군이 연달음으로써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소요하였으나, 공이 방도가 있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안도하였다. 황조의 장사(將士)가 왔을 적에 다른 군현들은 저들에게 욕을 많이 받았으 나, 저들이 공을 보면 공경하므로, 이졸(吏卒)들이 서로 축하하며 이르기를 “우리 부백 (府伯)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상국 사람들도 예로 대우하는데, 더구나 우리 백성들 무리 임에랴.” 하고, 일로써 속이지 말자고 서로 경계하였다. 이곳에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병 으로 체직되었다.

    무술년에는 성균관 직강, 홍문관 응교, 겸 시강원 필선,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고 통정(通 政)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김공수(金公睟)가 호조 판서로 있었는데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군량을 대지 못한다 하여 김수를 체직시키고 한응인(韓應寅)을 대신 호조 판서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좌승지 허성(許筬)이 양호의 의견을 따르자고 청하자, 공이 반대 의사를 견지하여 이르기를 “관작을 주거나 뺏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 이므로, 그 권한을 남에게 빌려 줄 수 없다” 하였는데, 선조의 하교가 공의 의논과 똑같 았다. 그러자 허성이 공의 견해에 감복하여 자신이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이어 우부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에 체배(遞拜)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갔는데, 함 께 간 사신이 비루한 행위가 있었으므로, 공이 그곳을 왕복하는 동안에 한 번도 그와 말 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의 모함을 받았다.

    기해년에는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는데, 병사(兵使) 이광악(李光岳)이 나주의 13도 (島)를 빼앗아 병영(兵營)으로 이속시키자, 공이 이 사실을 방백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광악이 여기에 앙심을 품고 다른 일로 공을 능멸하여 책망하므로, 공이 벼슬을 그만두 어 버렸다. 그러자 이광악이 공의 죄를 얽어 확대시켜서 조정에 보고하니, 선조가 하교 하기를 “정엽은 벼슬살이를 잘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방백에게 명하여 철저히 조사하게 한 결과 과연 끝내 그런 사실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잉 임하도록 하였으나, 공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그 후에 이광악이 군졸을 징집하면서 살 아 있는 군졸을 죽은 군졸로 처리하였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선조가 대단히 진노하고 양사(兩司)는 서로 소장을 올려 이광악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은 이때 간원 에 있으면서 이광악의 죄는 고의가 아닌 과오에서 빚어진 것임을 알고서 힘써 그를 구원하니, 사람들이 그제야 공의 마음씀이 공평함을 알았다.

    경자년에는 병조 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강직하게 일을 논의하니, 조야가 모두공의 인품을 사모하며 기대하였다. 이어 다시 병조 참의가 되어 영위사(迎慰使)로 관서(關西)에 가서 조사(詔使) 도사(都司)를 맞이하고 들어와 예조 참의가 되었다. 이때 기자헌(奇自獻)이 척리(戚里)로 일어나 권세를 은밀히 도모하면서 겉으로는 사류를 사모 한 체하였으므로, 당시 의논이 그를 이조 참판에 의망하려 하였으나, 공은 그를 불가하 게 여겼다. 그리고 기자헌이 혹 공에게 들른 적이 있더라도 공은 그에게 보답하여 사례 하지 않았으므로, 기자헌이 원한을 품고 은밀히 공을 중상하였다.

    임인년에는 기자헌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축출하면서 공을 물리쳐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그러나 공은 그 직임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서, 폐해진 일들을 일으키고 병폐된 것들을 제거하여 성지(城池)와 기계를 시원스럽게 일신시키고,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들을 장려하여 초하루와 보름이면 향교를 참배하게 하였으며, 학생 들에게 일과를 주어 시서와 예법을 가르침으로써, 종성 사람들이 책을 끼고 글공부를 하 게 된 일이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은 날마다 공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경전에 크게 힘을 써서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유고(遺稿)에 실 려 있다. 또 종성부에 황폐한 전답이 있었는데, 호조에서는 오히려 종성부에 명령을 발 부해서 그 세금을 다른 물품으로 대납하도록 하여 해마다 초피(貂皮)를 수백 장씩 징수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심지어는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상환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여 이 일을 혁파시켰다.

    계묘년 가을에는 노추(奴酋)가 홀온(忽溫)을 공격하면서 육진(六鎭) 길을 거쳐 수만의 기병이 갑자기 성 밖에 이르자, 모두 노(虜)가 우리 국경을 침범한 것이라 하여 백성과 병졸들이 물 끓듯이 소란해졌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아군과 적군의 수가 현격한 차 이가 나니, 기묘한 계책을 쓰지 않으면 저들을 방어하기 어렵다.” 하고는, 마침내 성문을 활짝 열고 기치를 많이 늘어세운 다음, 남녀 노약자까지 모조리 징발하여 군복을 입혀서 성을 순회하게 하되, 밤이면 횃불 하나에 두서너 가지를 만들어 함께 불을 붙이도록 하 니, 그 불꽃이 하늘까지 비추었다. 이에 앞서 공이 경내 호구(戸口)를 계산하여 성첩(城 堞)을 분담하여 주고, 급한 일이 있으면 와서 그 성첩을 지키도록 약속을 하였는데, 노가 이르자 과연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이 모두 모여 지킴으로써 노가 마침내 군졸을 이끌 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노가 7주야 동안 성을 포위하였으나 그들에게 패배당한 것은 없 었고 부노(府奴) 한 사람만이 사로잡혀 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정에 이 보고가 전해지 자, 이때 기자헌이 막 정권을 잡은 터라, 공이 적을 물리친 공로는 따지지 않고 한 사람 이 사로잡혀 간 것으로 공의 죄를 만들어 치죄(治罪)하게 한 뒤 동래(東萊)로 좌천시키 니, 종성의 선비들 가운데 소장을 올려 공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배소에 있으면서 오직 서적을 보며 스스로 즐기었다.

    갑진년에는 사유를 받아 광릉(廣陵)의 전장(田莊)으로 돌아와 있다가, 연해서 성주(星州) 와 홍주(洪州)의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모두 파면되었다. 그러자 공은 세상 에 용납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고 여강(驪江)의 옛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무신년에는 예 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기유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태학생들을 인솔하고 날마다 『심경』•『군사록』을 강의하면서 제대로 수업을 하지 못한 자는 회초리로 때려서 경 계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사학<四學)에도 나가서 강독하기를 마치 태학에서와 같이 하니 선비들이 모두 성대히 공의 풍도를 추향하였다.

    경술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선량한 자를 발탁시키고 간악한 자를 적발하여, 호 령을 엄숙하고 명백하게 하였다. 신해년에는 예조 참의, 승지를 거쳐 판결사가 되었는데, 관청에 오래도록 체류된 송사가 없었다. 이어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이 직에 있 은 지 이미 10년이 되었기에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이 모두 신진 소년이었고, 또 시사가 날로 그릇되어 감을 알고는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임자년에는 도승지가 되었는데, 광해군이 경연에 나오지 않으므로, 공이 간언(諫言)을 올리고, 또 임금이 사특한 자들의 인연하는 길을 터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여 넌지시 경계하였다. 이윽고 병으로 해면되었다가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 가선(嘉善)에 올 라 참판이 되었다.

    계축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해 여름에 박응서(朴應犀)란 놈이 이이첨(李爾瞻) 등 의 은근한 뜻을 받들어 허위 고변을 함으로써 마침내 큰 옥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국 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위로는 자전(慈殿)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무함하였 으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은 8세의 동자(童子)로 해도(海島)에 유배하였고, 명경(名卿)、 거실(巨室)을 체포 수감하였다. 그러자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자전께 효도를 극진히 하라는 뜻으로 진계하려 하였는데, 대부인의 저지를 받아 진계를 올리지 못하고는, 스스로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책임을 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갑인년에는 공조 참판으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을묘년에는 저주 사건으로 교서 를 반포하려 할 적에 이이첨이 금부(禁府)와 회의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공만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인하여 동지의금부사의 직임을 사퇴하였다. 이해 가을, 가의(嘉義)에 올랐 고, 병진년에 자헌(資憲)이 되었다. 공이 계축년 이후로는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오직 대부인 봉양 때문에 한산한 직임에나마 억지로 종사하기는 했으나 절반 이상을 시골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일본이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자, 공이, 반드시 황조(皇朝) 에 아뢰어 처리해야지 우리 마음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헌의하였다.

    정사년에는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무오년에는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논의가 결정되자, 항론하는 자는 법망에 걸리고 아부하는 자는 부귀를 도모하여, 온 세상이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는데, 공은 하찮은 지방관으로 영외(嶺巍)에 은거하여 산해(山海)의 절 경을 두루 다 수탐하면서 세속 밖에 유유자적하였다. 이때 궐내에서 사람을 보내 그곳에 사찰을 크게 짓고자 하여, 궁노(宮奴)가 후궁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나, 공이 거절하고 받 아들이지 않았다. 가을에는 파면되어 여주의 전장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로는 다시 경성 을 들어가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강상(綱常)이 단절되었는데 어찌 다시 벼슬아치의 반열 에 설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곳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동안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성 현들의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탐색한 결과 혼자만이 터득한 즐거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