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정시회 행장 - 상촌(象村) 신흠(申欽) / 한글 번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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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에는 광주(廣州)로 옮겨가 살면서 세상과는 날로 멀어졌으나, 시속을 걱정하는 마음은 가슴속에서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항상 자제에게 이르기를 “간악한 신하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현혹시킴으로써 국사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말 한 마디라도 올려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지 못하고, 몸을 감추고 한가이 물러나서 마치 세상 을 잊어버린 자와 같이 하고 있으니, 이는 성은을 크게 저버린 것이다.” 하였다. 기미년 에 일찍이 광해군이 엄한 교지를 내려, 재신(宰臣)으로 교외에서 쉬고 있다는 것으로 공 을 책망하자, 공이 대궐에 나아가 대죄하였는데, 임술년에 또 명을 내려 공을 독촉하였 으나, 공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계해년에 금상(今上)이 대의를 일으켜 반정(反正)하고 광해군을 강화(江華)에 안치시키 게 되자, 공이 말하기를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천명을 끊었지만, 신하들로서는 일찍 이 북면(北面)하여 섬겼던 분이니, 의당 곡하여 보내야 한다.” 하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기색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 조정에 들어갔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먼저 조정으로 들어가면 공을 배제하 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므로, 공이 참소를 피하여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한 시대의 명사들이 공이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모두 벼슬을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자 공 을 저해하던 자가 크게 뉘우쳐 다시 공과 기꺼이 화합하였는데, 공은 앞서의 일을 조금 도 개의하지 않았다.
이때 상이 사습(士習)을 새롭게 하기 위해 사표가 될 만한 조신을 가려 대사성으로 삼 으려 하자, 뭇 사람의 뜻이 공에게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대사성으로 동지경연 원자사부 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이 학제(學制)를 정하여 일과를 권면하기를 마치 옛날에 시 행하던 것과 같이 하되, 과조(科條)를 더욱 엄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횡당(黌堂)과 재사 (齋舍)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함께 거처하면서 학문을 강토하게 하였 다. 그러자 학생들이 날마다 책을 들고 사석(師席)에 나아가 공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 로 다투어 공을 사모하여 본받으니 법도가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지평 박지계(朴知誡)는 한빈한 선비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으로서 사묘(私廟)를 추숭(追崇)하라는 상소 를 올리자, 공이 그를 대면하여 “그대는 징사(徵士)로서 맨 먼저 상의 뜻에 영합하는 논의를 내놓는 것은 무슨 뜻인가.”고 힐책하였다.
이해에 폐조 때의 관계(官階)를 사헌부의 논의로 인하여 모조리 고치게 되자, 공 또한 자헌(資憲) 품계를 반납하였다. 이때 이조 참판 자리가 비어 공이 수선(首選)을 받았는데, 상이 공이 아니면 선비를 양성할 수 없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상이 대신에 게 묻기를 “옛날에도 실직으로 대사성을 겸임한 자가 있었는가?” 하니, 대신이 정인지 (鄭麟趾)와 서거정(徐居正) 등이 겸임했다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 성을 겸임했는데, 그 후 여러 관직에 누차 전임되면서도 대사성을 그대로 계속 겸임하였 다. 공이 간원에서도 매우 엄정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강(侍講)을 할 적에는 장 구(章句)의 훈고(訓誥)만을 위주하지 않고, 어떤 사건을 지적하는 데 있어 경도(經道)를 의거하여 넌지시 타이르곤 하니, 그때마다 상이 반드시 안색을 나타내어 들어주었다. 공 은 또 진계하기를 “전하께서 날마다 부지런히 경연에 임어하시는데도 성학(聖學)은 더 진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타고난 자질로 만일 학문에 공을 들인다면 요순이 되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이 재주와 슬기가 비록 높았더라도 진실로 학문의 힘이 없으면 그 정치는 끝내 반드시 구차했던 것입니다. 그러 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간절히 묻고 가까이 몸에 견주어 생각하며, 힘써 행하고 지키기 를 간략하게 하시어, 정치를 도모하는 데 있어 반드시 삼대(三代)를 표준으로 삼으소서. 또 야기(夜氣)가 청명한 때에 자주 유신들과 토론하여 끊임없는 공부를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겼다.
그 다음날에 야대(夜對)를 명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일을 아뢰었으나 상은 자못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천위(天威) 아래서는 신하들이 회포를 진술하려 해도 항 상 두려워서 머뭇거리어 백에 한두 가지도 진달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전하께서 말이 없 이 대하심에리까. 전하께서 애써 나라를 다스린 지 벌써 1년이 지났음에도 치적에는 그 만한 보람을 얻지 못했는데, 신이 삼가 그 연유를 헤아려 보니, 상하가 모두 하나의 사 (私) 자를 타파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상께서 하신 아무 일 은 사(私)이고, 아무 일도 사입니다.” 하며 10여 가지 일을 죽 열거하니, 상이 안색을 엄 숙하게 고치었다. 또 말하기를 “경연을 여는 날에는 대간의 계사를 의당 바로 들어와 아 뢰어서, 위에 간언 들어주기를 급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유배지에 있는 광해군이 일찍이 병이 났는데, 공이 중종 때에 연산군을 대접하던 규례 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광해군이 비록 종사의 죄인이기는 하나 신이 일찍이 그를 섬겼 었으니, 그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어찌 옛정이 없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 리니, 상이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에게 수용되는 물품을 후히 보내도록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폐조대의 궁인 중에 죄가 있는 자는 죽이거나 유찬시키는 것이 합당하지만 그 나머지는 꼭 심하게 다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폐조 때의 궁녀들은 모두 악행 을 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다시 액정(掖庭)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상소하여 시무에 관해 수천 언을 진술하였는데, 그 귀추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갑자년 봄에 이괄(李适)이 모반하자, 이원익(李元翼)이 도체찰사가 되어 공을 불러 부체 찰사로 삼았는데, 적병이 도성 가까이 깊이 들어옴으로써 도성의 인심이 몹시 소란해졌 다. 그러자 공이 상께 아뢰어, 왕자와 삼사의 여러 관원들로 하여금 금중(禁中)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역적 제(瑅)가 이 사변 초기에 흉독을 제멋대로 부리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이때 적이 경기 지방에 육박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피란 계획을 결 정짓지 못한 채, 서로 앞을 다투어 집안의 귀중품들을 가지고 나가 피하므로, 공이 그것 을 논박하였다. 그런데 적에 대한 경보가 점점 급하여지자, 공이 곧바로 서울을 떠날 계 책을 결정하였다. 하루는 공이 상의 앞에서, 좌우에서 좋은 계책을 헌의하는 자가 하나 도 없음을 분하게 여겨 성난 목소리로 진언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순간에 달려 있는데, 이 어찌 대신이 말을 하지 않을 때입니까.”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강화(江華)로 가려고 했다가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따라 남쪽으로 가게 되었다. 한강을 건널 적에 배 안의 물이 무릎까지 찼는데도 공이 조용하게 절하고 꿇어 앉자,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황급한 때에 어찌 예를 차리는가.” 하니, 공이 사례하기를 “아무리 급한 때인들 어찌 감히 예를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적이 패하여 적의 목이 바쳐지자, 상이 백관에게 은전을 내리고 특히 공에게는 자헌 품 계를 도로 주었다. 도성에 돌아와서는 정헌(正憲) 품계에 승진, 대사헌에 제수되자,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일체 법에 따라 시행하였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세 상이 혼란한 틈을 타서, 유배 중에 있던 재신 권진(權縉)을 제멋대로 죽였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런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된다.” 하고, 그의 죄과를 상주하여 탄핵하였다.
그리고 새로 지은 본궁(本宮)의 종이 궁가(宮家)의 인지(印紙)를 가지고 민간에 횡행하 자, 공이 헌부에서 그 횡행한 자를 형신하였다. 그러자 상이 자전께 그 일이 관계된다 하여 헌부의 관원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의 말에 의해 그 명이 환수(還收)되기 는 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을축년 봄에 세자의 관례(冠禮)를 행하고는, 공이 원자 사부로서 1품인 숭정(崇政)에 승 진되어 세자좌부빈객이 겸해졌는데, 공이 이를 사퇴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이 원자를 가르치는 것이 매우 지성스러우므로, 내가 가상히 여겨 감탄한 지 오래이다.” 하였다. 이 때 이조에서 공의 자급이 이미 숭품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사성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 는데, 상이 원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공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잉임시켰다가, 대신에게 물어 본 결과, 대신이 체직시켜야 한다고 대답하자, 상이 그제야 체직을 윤허하였다.
이때 공이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어 드러눕자, 상이 내의를 보내 위문하였다. 병이 위 독해지자, 공이 유차(遺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과 사정(私 正)을 분별할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그해 여름에 별세하니 향년이 63세였다. 공은 병이 막 들었을 적부터 부녀자를 물리치고 조용히 거처하였는데, 별세할 때 역시 부인이 뵙기 를 청하였으나 공이 손을 휘저어 거절하고는 베개를 옮겨 동쪽으로 머리를 두르고 운명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슬퍼하고 조회를 폐했으며, 우의정을 증직하라고 명 하고 의식대로 부의(賻儀)와 조제(弔祭)를 내렸다. 동궁도 요속을 보내어 조제하였다.
공의 손자 원(援)이 공의 유차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선경(先卿)의 유차를 보니, 죽 음에 임박해서도 임금을 잊지 않아서, 충직하고 절실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 있 었다. 유차를 재삼 펼쳐 보고 내가 매우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고 몽매할지라도 감히 그 말을 가슴속에 간직하여 지하에 있는 선경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 겠는가.” 하였다. 태학생들은 성균관을 비우고 모두 와서 제전을 드렸다. 이해 6월에 양 주(楊州)의 소재지 서쪽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여기는 선영이다.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조 판서 산보(山甫)의 딸인데, 인자하고 유순하고 온화하 여 남편을 짝함에 있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1남 4녀를 두었다. 1남 원석(元奭)은 문과 에 급제하고 현감이 되었는데, 심종민(沈宗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그가 바로 원(援)이다. 장녀는 이정철(李廷哲)에게 시집갔는데, 이정철은 감역(監役)이고, 다음 은 나만갑(羅萬甲)에게 시집갔는데 나만갑은 교리이다. 그 다음은 유철증(俞哲曾)에게 시 집갔고, 그 다음은 이상질(李尙質)에게 시집갔다. 이정철은 2남 3녀를 두었고, 나만갑은 2남 1녀를 두었으며, 유철증은 1남 1녀를 두었다.
공은 자품이 뛰어나고 기국이 엄정하며, 풍채가 청수하고 기거동작이 묵중하며, 식견이 고원하고 언론이 정대하였다. 옛을 좋아하되 현시대에 어긋나지 않고, 시속을 따르되 세 상과 혼동되지 않았다. 일찍부터 사우(師友)를 종유하여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었고, 고 서를 깊이 연구하느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그 중에도 『주역』、『근사록』、 『심경』등의 글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먼저 가묘(家廟)를 배알하 고 대부인께 문안을 드렸다 좋은 때에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대부인을 모시고 잔치를 하며 즐겼고, 이를 동기간과 친척들에게까지 베풀어 주어 한결같이 성신(誠信)으 로써 서로 화합하였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몸소 살펴 마련하되, 모 든 것을 미리 갖추어 저장해 두곤 하여 조금도 신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자신을 위하는 데는 절약하고 검소하여, 한 끼니에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나라에서 받은 봉록은 자기 맘대로 하지 않고 대부인에게 드리어 대부인이 하는 대로만 따랐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는 권세를 피하기를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하여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적인 일로 간청하지 못하였다. 공의 모당(母黨)과 처당(妻黨)들이 폐조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으면서, 공을 배경 으로 임금의 원조를 받기를 바랐으나, 공이 일체 물리치고 통하지 않았다. 이이첨(李爾 瞻)、박승종(朴承宗)과는 평소의 교분이 있었는데, 그들이 정권을 쥐고 나서는 공에게 더 욱 친절을 베풀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으니, 소인을 대하는 데 있어 미워하지 않으면서 엄격하기는 이와 같았다. 여가로 글을 더러 지었는바, 그 글은 풍부하고 활달하며 사리 가 통창하였는데, 공이 저술한 『易學釋疑』'『近思釋疑』와 유고(遺稿) 약간 권이 집 에 소장되어있다.
공이 벼슬을 한 지 40여 년에 걸쳐, 조정에 들어가서는 경악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 서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했다 하면 극진히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 는바,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고 세상의 교화를 만회시키려고 힘썼다. 또 밖으로 나가 주군들을 다스릴 적에는 은혜와 위엄을 병행함으로써,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 은 은혜에 감복하여, 이르는 곳마다 훌륭한 장관이라 일컬어졌고, 공이 떠나고 나면 더 욱 사모하곤 하였다.
천지의 강상이 무너지던 때를 당해서는 그 탁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나 천 길 밖으로 훌쩍 떠나 있음으로써, 혼탁한 시속에 물들지 않아 이름과 행실이 다 온전하게 되었으 니, 어찌 책임은 중하고 갈 길은 멀기에 대절(大節)을 당해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는 분 이 아니었겠는가. 만년에야 성명한 임금을 만나서는 자주 국가의 이해를 논의하여 명망 과 실제가 아울러 융성해짐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공을 재상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불행하게 역량대로 다 쓰이지 못하고 작고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찍부터 공과 막역한 교분이 있었고 진퇴와 출처도 대략 서로 같았는데, 공은 다 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아들 원석(元奭)씨가 공의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보여 주고 또 나에게 행장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는데, 그 기록을 보니, 공의 돈후한 덕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위에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그 번다한 것만 산삭하여 돌려보내노니, 비석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는 일은 당세에 덕행 있고 문장에 능한 분이 하게 될 것이다. 동양(東陽) 신흠은 행장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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