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낙산사에 묵으며(宿洛山寺) / 교산(蚊山) 허균(許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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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사를 다시 찾아오니 重尋五峯寺
풍경은 지난해와 다름 없네 風景似前年
대숲 길은 오가는 가을 발길 竹逕通秋屐
화대엔 저녁연기 일어나네 花臺起夕煙
스님들이 늘어서서 환영하는데 歡迎羅衆衲
멋진 놀이 제천을 밟아가네 勝踐躡諸天
이미 무생인을 깨달았으니 已悟無生忍
숙연히 속된 인연 씻어 버렸다오 蕭然淨俗緣
『惺所覆瓿稿』 卷之一 詩部一, 楓嶽紐行, 宿洛山寺
허균(선조 2년, 1569년~광해군 10년, 1618년)의 본관이 陽川이고, 자는 端甫, 호는 蛟 山, 惺叟, 惺惺翁, 白月居士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허엽은 문장가로서 文名이 높았으며 大司諫承旨•副提學大司成•大司憲吏書參議•경상 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강한 성격과 그리고 명나라 進賀使가 되어 皇太子의 册封을 祝 賀하는 외교가로서 그리고 당쟁시대 중심인물이었다.
草堂의 前妻는 韓叔昌의 女로 큰 누이는 朴舜元에게, 次女는 禹性傳(문과급제대사성 에 이르렀고,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움)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伯兄 筬이 있 고, 후처인 金光轍(예조참판)의 女는 강릉김씨로 仲兄 笋과 작은누이 蘭雪軒 그리고 筠 은 후처소생이다. 이처럼 균은 후처소생으로 가정 내에서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정 신적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그가 가정 내의 정실과 서얼문제에 관심을 갖고 소설로 형 상화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草堂의 前妻는 韓叔昌의 女로 큰 누이는 朴舜元에게, 次女는 禹性傳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伯兄 籠 이 있고, 후처인 金光轍(예조참판)의 女는 강릉김씨로 仲兄 篈과 작은누 이 蘭雪軒 그리고 筠은 후처소생이다.
9세(1577년)에 부친을 따라 건천동에서 庠谷(明禮坊)으로 이사 하였다. 『於干野譚』에 의하면 총명하고 영특하여 9세(선조 11년, 1578년)에 능히 作詩하였다.
교산 허균은 황해도 도사, 성균관 전적, 수안군수, 공주목사, 삼척부사, 형조참의 추천 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형조판서, 좌참찬 등을 엮임 했으나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홍길동전과 문집 성소부부고 등이 있다.
25세(1593년, 선조26) 낙산사에서 두보의 시를 공부하였다. 허균은 낙산사에서 임진왜란 중에 아내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학문정진에 힘써 26세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낙산 사는 푸른 동해를 접하고 있고,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글을 읽으며 당쟁과 불합리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자신의 이상을 정립한 곳이다. 청정하고 원대한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상적 근원과 철학을 정립한 곳으로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
허균은 벼슬길에서 잦은 파직과 유배를 당하면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다. 조선조에 허 균만큼 영옥의 삶을 산 사람도 없다. 이러한 삶속에서 교산은 불가의 세계를 좋아하여 불서와 불교사상을 심취해 있었다. 낙산사를 찾아 당대의 고승들과 교류하며 자신세계를 넓혀 왔다. 이 시는 낙산사를 찾아 묵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세속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된 인연이 멀어짐을 아쉬워하며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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