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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113. 석주에게 주는 글(與石洲書) / 교산(蛟山) 허균(許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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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서울에 있을 적에 형이 강도(江都)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벼슬 잃음을 위로 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문을 나오는 참이었는데, 찾아 온 사환이 편지를 놓고 떠나겠다고 하기에 총망중이라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우물쭈물 결례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집을 떠난 이틀 만에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천학(泉壑)과 계산(溪山)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에 못지않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관)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향의 (香蟻 술독에 뜬 쌀을 벌레에 비유한 것)가 한창 굼실거리니 형을 초치해다가 큰 술잔으 로 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형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도 성벽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하곡(荷谷 허봉 (許對)의 호)의 시가 남아 있어 청초하여 읊을 만했고 또 자민(子敏 큰 안눌-李安訥-의자)의 시가 있었으나 바빠서 화운을 하지 못했습니다.

    비를 만나 통구(通溝)에서 자고 단발령(斷髮嶺)을 넘어 멀리 1만 2천봉을 바라보니 빙 둘러 있는 봉우리들이 서로 읍을 하며 마치 나의 나들이 걸음을 맞이하는 것 같았습니 다. 유람하는 흥취가 날듯이 홀가분함을 스스로 금치 못하며 말을 재촉하여 장안사(長安 寺)로 드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었습니다 중 도관(道觀)이 호남에서 왔는데 그가 글을 약 간 알기에 함께 이야기해 보니 매우 밝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에 드니 깎은 듯한 바위는 땅 위로 솟아 삐죽이 서 있고, 물은 솟구쳐서 내리고, 단풍은 우거져 하늘 가득 빽빽하였습니다. 15리쯤 가서 영 원(靈源)에 당도하여 거기서 묵고, 새벽에 망고대(望高臺)를 향해 가는데, 골짜기는 좁고 벼랑은 깎아지른 듯하여, 쇠줄을 잡고 겨우 올랐습니다. 송라(松蘿) 아래 잠시 쉬고 드디 어 만폭동(萬瀑洞)에 들어가 양봉래(楊蓬萊 봉래는 양사언-楊士彦-의 호)의 팔대자(八大 字)를 완상하니 필세(筆勢)가 나는 듯 하여 이 산과 더불어 웅(雄)을 다툴 만하였습니다. 돌아오면서 명연(鳴淵)에 닿아 저녁에 표훈사(表訓寺)에서 쉬니, 주승(主僧) 담유(曇裕)가 자리와 상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날이 밝자 진헐대(眞歇臺)에 올라 거기서 남여(藍輿)를 버리고 걸어서 개심사(開心寺)에 오르니 1만 봉우리가 눈앞에 죽 늘어 있어 그 모습을 이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높이 솟아 치켜든 것은 마치 그대가 우뚝하게 빼어나 홀로 선 모습 같고, 그 헌걸차고 기우뚱 한 것은 마치 그대가 취해서 옥산(玉山)이 넘어지는 모습과 같았으니, 이들을 보면서 내 마음을 족히 위로할 수가 있었습니다. 17일 밤에는 정양루(正陽樓) 동쪽에서 달을 구경 하였습니다

    원통(圓通)에서 조반을 들고 난 다음, 지름길로 사자봉(獅子峯)으로 질러가 보덕굴(普德 窟)에서 묵고는 화룡담(火龍潭)을 거쳐 마하연(摩訶衍)에 닿았습니다. 바람과 물, 삼나무, 회나무가 밤새도록 부벼대고 너울거려 음향을 내니, 마치 생황과 학이 서늘하게 구름 밖에서 우는 듯 하였습니다.

    바로 운흥(雲興)을 거쳐 구정봉(九井峯)에 오르다가 비가 오므로 비로봉(毗盧峯)에는 오 르지 못하고 적멸(寂滅)에 당도하여 성문동(星門洞)을 내려다보니, 뭇 골짜기가 층층이 겹쳐 있어 마치 긴 바람이 바다에 파도를 일으켜 놓은 것 같았습니다. 두 중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박달곶(朴達串)으로 가면 은신대(隱身臺)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 다. 나는 신발을 준비하고 새벽 기운을 헤치면서 백전(白田)으로부터 꼬부랑길을 내려가 5리쯤 가니, 울퉁불퉁한 돌이 한데 모인 곳에 사나운 물줄기가 그 사이로 뿜어대는데, 돌들은 모두 괴수처럼 생겨 그 모습이 마치 서로 치고 있는 듯 하였소. 그래서 나는 맨 발로 건너왔습니다.

    정오에 자월암(紫月庵)에서 쉬니 암자가 내산、외산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승경(勝景)을 다 모두어 놓았는데, 대체로 구경꾼들이 오지 않은 곳이 었습니다.

    남쪽 비탈을 구불구불 내려와 불정대(佛頂臺)에 닿았는데, 잠시 후에 바람과 천둥이 골 짝 안에 일고 큰 구름이 평평하게 깔리며 발 아래로 번갯불이 번쩍이고 쿵쾅거리매 놀 라서 내려다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윽고 천둥이 개고 나니, 1천 폭포가 푸른 절벽에 시원하게 내 려, 마치 옥빛 무지개가 다투어 뽐내는 듯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유점(榆店)에 닿으니 정생 두원(鄭生斗源)이 뒤 미쳐 와서 현담(玄談)을 나 누다가 오경(五更)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쉬고 산을 내려오면서, 백천교(百泉橋) 를 거쳐 가섭동(迦葉洞) 쪽으로 길을 잡고 명파(明波)에서 묵었습니다. 대개 삼일포(三日 浦)는 옛날에 익히 지나던 터이라 이 때문에 임영(臨瀛)으로 바로 향했으니, 두 번씩 구 경하지는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수성(䢘城)에서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를 만났더니 무척이나 기뻐하며 3일을 붙잡아 두더군요. 또 석주(石洲)는 요사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고, 자기 가 지은 시문을 모두 꺼내 보여 주었는데 시마다 주옥(珠玉) 같았습니다.

    인하여 옛 부임지인 낙산(洛山) 땅을 찾으니, 그 고을의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장작을 가지고 와서 다리를 덥혀 주었고, 태수(太守)가 또 기생과 풍류로 호사를 더해 주니 호연 히 안석(安石)의 동산(東山)에서 노닐던 흥이 있었습니다.

    말이 절뚝거려 닷새를 머물렀다가 강릉 외가(外家)로 돌아오니, 내가 고향집을 떠난 지 벌써 8년이라 풍상을 겪는 서글픈 마음이 배나 더하였습니다. 읍 동쪽에 작은 서당이 있 어 학생 5~6명이 문을 닫고 책을 읽고 있으니, 잔생(殘生)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으나, 하 늘이 사람의 욕심을 허락해 줄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산(海山)을 크게 구경한 것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만약 형과 함께 다 녔더라면 그동안에 지은 주옥같은 시가 의당 많았을 것이니, 형이 이 말을 들으면 틀림 없이 유쾌하게 여기며 또한 크게 한스러워할 것입니다.

    벼슬할 뜻은 식은 재(灰)처럼 싸늘해지고, 세상맛은 씀바귀처럼 쓰며, 조용히 사는 즐거 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으니, 어찌 내 몸 편함을 버리고 남을 위해 수고하겠소. 오직 벗에 대한 그리움이 내 마음속에 맺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회포를 다 풀 수 없 습니다. 가을 기운이 점점 짙어가니 부디 양친(兩親)을 잘 모시고 양지(養志)를 다하기 바랍니다. 편지로는 말을 다 못하고 뜻도 다 적지 못합니다. 다 갖추지 않습니다.

     

    與石洲書

    在洛下得兄江都書。唁僕失官。此時僕已戒轄出都門。來价置而告去。忙不草復脩謝。逋慢 之罪。安所逃乎。僕辭家二日。抵正卿永平潭墅。泉壑溪山之勝。不減昔年。而所恨者。臺 館不起廢耳。入室。醇酒滿甕。香蟻浮浮。恨不拉吾兄以大白侑之。聞之。必流餚涎也。至今城壁有孤竹,荷谷詩。淸楚可詠°又有子敏詩。悤悤不得和矣。冒雨宿通溝。踰斷髮嶺。 遙見萬二千峯環峭拱揖。如迓吾行。游興翩翩不自禁。促馬入長安寺。日已曛矣° 釋道觀自 湖南耒。稍解文與。語甚適。明早携入十王百川洞。巖峭拔地骨立。水激瀉。楓栝參天。行 十五里抵靈源宿。曉向望高臺。峽束崖斷。攀鐵絙僅陟。小憩於松蘿。遂入萬瀑洞。翫揚蓬 萊八大字。筆勢飛躍。可與此山爭雄。回至鳴淵。夕休於表訓寺。主僧曇裕設蒲供以待。明 登眞歇臺。去藍。步躋開心臺。萬峯森在眼底。不可名狀。其峻拔而仰然。若君之標秀特 立。其隗俄而頹然者。若君之醉倒玉山。對此足以慰吾懷也。是十七夜。待月於正陽樓東。 朝飯圓通。取經於獅子峯。宿普德窟。歷火龍潭。抵摩訶衍。風泉杉檜。徹曉磨站作響 如 笙鶴冷冷於雲表。卽由雲興登九井峯。以雨不克上毗盧。到寂滅下視星門洞。衆壑嶙峋。如 長立扇。海,濤二僧言。自此下抵朴達串。可達於隱身臺。余治蠟屐。拂曙從白田而下。繚 曲行五里許。始石叢立。悍湍潰其中。石皆作怪獸狀。如欲相搏。赤足躍流而濟 午息于紫 月庵。庵正據內外山之間。悉摠其勝。蓋游人未嘗到也°迤從南崖。到佛頂臺。少選風雷起 於中壑。大雲平鋪。脚底電光。閃閃轔。 愯不可頫眺。俄歇則千瀑快垂於靑壁。若玉虹爭矯 然。昏抵揄岾。則鄭生斗源踵至。玄談五更而睡。留一日下山。從百泉橋取途於迦葉洞。宿 于明波。蓋三日浦。舊所慣歷。爲直向臨瀛計。不復游也。翌日。見崔東皐於䢘城懽甚。挽 二日留。且問石洲今作何狀。盡出其詩文以示。觸目琳琅珠玉也。因訪洛山舊踐。則鄕耆宿 俱持壺耒煖脚。太守又以妓樂侈之。浩然有安石東山之興焉°以馬蹇留五日。歸江陵外家粉 榆。僕不修謁已八年。霜露之愴倍切矣。邑東有小塾。與學子五六人閉戸讀書。欲了殘年。 未知天從人欲否。海山壯游。大略如斯。當時若同吾兄。則奚囊所收珠璧當富。兄聞之。必 大愉快。亦大恨嘅也。宦情灰冷。世味茶苦。靜處之樂。甚於軒裳。豈肯捨我所便而爲人役 役耶。唯是停雲之念。結於中情。地遠難聚。懷不能遺。秋候漸沍。幸好侍二萱親。以畢養 志。書不盡言。言不盡意。不備。

     

    『惺所覆瓿稿』 卷之九 文部六, 書

     

    석주에게 준 서찰에 의하면 옛 부임지인 낙산(洛山) 땅을 찾으니, 그 고을의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장작을 가지고 와서 다리를 덥혀 주었고, 태수(太守)가 또 기생과 풍류로 호 사를 더해 주니 호연히 안석(安石)의 동산(東山)에서 노닐던 흥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파직되어 산수를 유람하던 허균에게 양양인의 변하지 않는 의리와 여유 있고 아름다운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허균과 양양, 그리고 낙산사는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