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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133. 낙산사제영 (洛山寺題詠) /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페이지 정보

    조회 18회

    본문

    사찰을 살펴보니 관동의 절승이니 寺壇關東勝

    쓸데없는 나라 근심만 깊었네 吾深杞國憂

    일찍이 그림 쫓아 그 안을 보았는데 曾從畵裡見

    지금이 바로 꿈속에서 노는 것 같네 今似夢中遊

    창해에서는 먼저 뜨는 해 보고 滄海先觀日

    건곤은 홀로 다락에 의지하였네 乾坤獨依樓

    한 밤중에 나는 한 줄기 피릿소리 三更一聲笛

    만 리에 떠 있는 조각구름 걷는 구나 萬里片雲收

     

    『峴山誌』

     

    이경석(선조 28년, 1595년~현종 12년, 16기년)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쌍계(雙磎)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광해군 9년(1617년) 증광별시에 합격했으나, 다음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삭적(削籍)되 었다. 인조 1년(1623년) 인조반정 뒤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검열•봉교•춘추 관사관(春秋館史官) 등을 지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승문원주서로서 왕 을 공주로 호종(扈從)했다.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했고, 정언•교리 등을 거쳐 1626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 장만(張晚)의 종사관(從 事官)으로 강원도 지방의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썼다. 양주목사•승지를 거쳐 1632 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부제학으로〈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을 찬진(撰進)했다. 1638년 양 관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1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 사(貳師)로 심양(瀋陽)에 갔으나 1년간 봉황성(鳳凰城)에 구금되었다. 귀국한 뒤 대사헌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효종 즉위년(1649년) 영의정이 되었다. 1653년에 풀려나 영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현종 9년(1668년)에는 궤장(几杖)을 받았다. 남인이라서 송시열 (宋時烈) 등 서인으로부란이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아 유임되었다. 저서로 『백헌집』이 있으며,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長陵誌狀」을 편찬했다. 남원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