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이생 덕망을 곡하면서(李生德望哭) / 미수(眉叟) 허목(許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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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를 피해 가다 양양 길에서 逃亂襄陽道
서로 만나 고생을 이야기 했네 相逢說艱難
은근히 연상으로 찾아와 慇懃漣上訪
나의 어려움 슬퍼했네 哀我遷凶艱
이 깊은 정에 감동되어 感此情意深
만날 때 마다 기쁜 얼굴이었네 逢場開好顔
궁한 처지에도 자주 찾아 주기에 窮途頻見過
늙어서도 기쁘게 지냈나 했더니 垂老得交懽
뉘 알아서 생사의 나눔이 誰知死生別
겨우 한 달 사이에 있을 줄을 遽在旬月間
아득히 죽음에 돌아갔으니 昧然歸化盡
모든 일이 한 번의 탄식뿐이네 萬事一嗟嘆
평생 품은 뜻 회상해 보니 顧想平生意
가엾고 딱한 마음 아프기만 하구려 惻惻已含酸
한 백년 목메어 우는 곳은 百年嗚咽處
백양나무 쓸쓸한 무덤가로세 墟墓白楊寒
「眉叟記言』 別集
허목(선조 28년, 1595년~숙종 8년, 1682년)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화보(和甫)문 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이다. 모친은 임제(林悌)의 딸이다. 광해군 7 년(1615년) 정언옹(鄭彦)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 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현종 1년(1660년)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 어 삼 년 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 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 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 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 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 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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