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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147. 낙산사(洛山寺)에서 판상 시에 차운하며 / 명제(明齋) 윤증(尹拯)

    페이지 정보

    조회 17회

    본문

    낙산사(洛山寺)에서 판상 시에 차운하며 

    (洛山寺次板上韻)

     

     

    도가 소멸과 성장 관여치 않으니 不關道消長

    어찌 인간의 즐거움과 근심 알겠는가 何知人樂憂

    또한 장차 나무로 활과 화살 만드는 뜻은 且將弧矢志

    바다와 산에 의지하여 놀 것을 즐기려 하네 聊付海山遊

    초여름 맑아 절기가 화합할 때 首夏淸和節

    배꽃이 낙산루에 피었구나 梨花洛山樓

    창해는 만 리나 되는데 滄溟正萬里

    날 저물어 채운이 걷히는구나 日夜彩雲收

     

    『峴山誌』

     

    윤증(인조 7년, 1629년~숙종 40년, 1714년)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 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장인인 권시(權調、)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 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현종 4년(1663년)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 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 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숙종실록』은 윤증 의 생애를 배신으로 기술했지만 사실상 그는 한 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 남인• 노론(老論)과 함께 3대 정당 중의 하나인 소론(少論)을 이끌었던 저명한 정치가였다.

    스승인 송시열과 대립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이 문제로 이로 인하여 윤증과 송시열은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지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 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명재유고』•『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 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 (文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