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준하주 청견사에서 호곡 남용익의 시를 차운함 / 해사(海槎) 조엄(趙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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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하주 청견사에서
호곡 남용익의 시를 차운함
(駿河州淸見寺次南壺谷龍翼韻)
해사(海槎) 조엄(趙曮)
해 돋는 동쪽이라 청견사란 절이 있어
문을 열면 만 리의 파도를 대하게 되네
스님이 입정(入定)하자 흰 구름 떠오르고
누각(樓閣)이 높으니 나는 새를 내려보누나
낙산사(洛山寺)도 이처럼 그리면 좋겠구만
한국(韓國)의 사신은 시를 많이 부쳤다오
풍광의 바깥일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언어가 다른지라 어찌하리오
日東淸見寺
門對萬里波
僧定白雲出
樓高飛鳥過
洛山同畫可
韓使寄詩多
欲說風光外
殊音奈爾何
남호곡이 일찍이 이 절을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다 비했으므로 스님들이 이 말에 인하여 낙산사의 그림을 그려 보내달라고 하기에 경련(頸聯)에서 언급하였다.南壺谷曾以 此寺比之襄陽洛山僧仍是語乞畫洛山故頸聯及之)
『海槎日記』
조엄(숙종 45년, 1719년〜정조 1년, 1777년)의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이조판서 상경(商絅)의 아들이다. 영조 14년(1738년)생원시에 합격 하였고,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 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 (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유배 중에 아들 진관(鎭寬)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 도에서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였다. 정 조 18년(1794년)좌의정 김이소(金履素)•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账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순조 14년(1814년)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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