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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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선질꾼은 존재했다. 6·25 이후에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하여 단목령을 넘었는데 그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 김충현(여, 1929년생)
한국전쟁으로 남편은 인민군에 끌려가 생사를 모른 채 돌아오지 않았고 전쟁 통에 집 은 불타버려 매우 어렵게 살았다. 양양이 수복(收復)되자 장(醬)이라도 담아 가족들의 호 구(糊口)를 연명하려고 봇짐을 만들어 단목령을 넘어 인제읍 진동리 설피밭에 사는 언니 네 집으로 갔다. 태어난 지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업고 시어머니와 함께 소금 열 됫박, 아지(전갱이) 자반 한 두름, 북어 한 쾌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기도 하면서 단목령을 넘 어가서 언니가 소개해준 집과 메주 세 덩이, 메주콩 두 말, 고춧가루, 건 나물, 건 버섯 등과 맞바꾸었다.
당시 길이 험했는데도 짐을 지고 단목령을 넘어 오색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시던 형부 (兄夫)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1971년 인제에서 오색령을 넘는 44번 국도가 개통되자 단목령을 넘는 사람은 급격히 줄어들면서 영로의 기능은 쇠퇴하였다.
그러나 봄철이면 단목령 마루 일대에서 산나물을 대량으로 채취하여 그곳에서 데치고 말려서 건나물로 만들어 등에 지고 운반해 오는 도로로 변하였다.
또한 정부가 씨감자를 보급하기 전에는 양양지역은 영서지방의 고랭지(高冷地) 감자를 구하여 종자로 썼다.
■ 김완달(남, 1944년생), 추종삼(남, 1942년생)님의 증언
소금, 명태, 고등어자반, 마른미역을 한 짐 지고 단목령을 넘어 진동리 설피밭으로 가 면 그곳에서 5포대의 씨감자와 교환할 수 있었다. 씨감자의 양이 많고 무거운데다 급경 사에 매우 험한 길이라서 한 번에 나를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씨감자를 지고 가기 알맞게 여러 개로 나눈 후 몇 번씩 일정한 장소까지 나 르고 다시 그 다음 장소로 운반하기를 반복하여 오색분교 근처까지 힘겹게 옮기는데 이 를 전쳇짐이라 한다. 전쳇짐으로 영을 내려오면 질메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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