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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3. 근대(近代)의 피난(避難) 길 단목령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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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가. 동학농민운동


    1860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장남 세정(世貞)은 영월, 양양, 인제 등지로 피신하여 생활하면서 그 지역의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동학에 대한 관가(官家)의 탄압이 심해지자 양양 김덕중(金德中)의 집에 피신해 있던 세정은 1870년 10월에 좀 더 안전한 곳인 첩 첩산중의 인제 귀둔리로 단목령을 이용하여 거처를 옮겼다. 세정은 처와 둘째 여동생과 함께 귀둔리에 있는 장춘보(張春甫)의 집에서 지냈다. 당시의 귀둔리(貴屯里)는 오색령과 점봉산을 사이에 두고 양양과 인접해 있어 단목령을 이용하면 인제보다 양양이 더 가까 운 생활권이었다. 양양의 동학교인(東學敎人)들은 단목령을 넘어 다니며 귀둔리 교인들과 신앙생활을 함께 이어갔다.

    양양 관아에 체포된 김덕중이 고문에 못 이겨 세정의 거처를 말하자 관군을 귀둔리로 보내어 최세정을 체포하여 양양 감옥에 수감하고 세정의 처와 여동생은 인제 감옥에 가 두었다. 세정은 양양 감옥에서 고문 끝에 1872년 5월 12일 장사(杖死)되었다.



    나. 을미(乙未)년과 정미(丁未)년의 의병활동


    동학농민혁명(1894년~1895년)에  참여했던  동학농민군은  산간오지(山間奧地)에  은거 하여 있다가 1895년 을미(乙未)에 의병에 가담하였다.

    1896년  민용호(閔龍戶)가  이끄는  의병과  관군이  충돌하여  양양면  소재지에서  임천리 까지 싸움터가 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관군의 증원으로 의병들이 불리해지자 단목령 을 넘어 진동리로 퇴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전투에서 민가 30여 호가 소실되었다.

    정미의병 당시 1908년 5월 9일 이강년이 부하 300여 명을 거느리고 양양 우편취급 소를  습격하여  양양분견대  및  주재  순사와의  5시간  동안  전투  끝에  10여  명이  부상당 하였다는 기록이『폭도사편찬자료(暴徒史編纂資料)』에 기록되어 있다.

    산악이  많은  양양과  인제는  의병들의  유격전  활동에  지리적으로  유리하였고, 나아가 이곳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의병들의 활동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 의병들은 박달령을 넘나들며 양양과 인제에서 활동하였다.



    다. 일제강점기 바지게꾼의 등장


    일제강점기에도  보부상(褓負商)들은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신 작로(新作路)와 철도를 개설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물류가 이동하였다. 그러나 지방은 여전히 5일 장에 의존하였는데 일제는 일본인들의 상권 보호를 위해 조선의 보부상을 강 제로 해산시켰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물자와 화폐를 전국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등짐장수가 등장하였고, 이들은‘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하여 활동했다. 이때에 등장한 등짐장수를“바지게 꾼”이라 불렀으며 이들이 서서 쉰다고 하여“선질

    꾼”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는 대량의 물류가 이동하는 신작로와 항구를 중심으 로 장이 발달하였다, 이처럼 장이 증가하게 된 것은 일제가 정기 시장을 통해 자원을 수 탈(收奪)하려는 정책에서 나온 결과라 볼 수 있다.


    ■ 선질꾼이 사용한 운반 도구 바지게

    등짐장수의  운반  도구는  주로  봇짐과  바지게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게 는 지게 몸체와 가지가  한 몸으로 되어있지만, 등짐장수는  지게 몸체만 있고 가지가  없 는“바지게”나  지게  몸체에  가지를  끼워서  만든“쪽지게”등을  사용하였다. 바지게는  해 안 지역에서 나는 수산물을 내륙으로 팔러 다니던 등짐장수가 쓰던 지게이다. 이 지역의 등짐장수들은 산을 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파른 산길을 다니기에 유리한 바지게를 사용하였다. 쪽지게는 주로 서해 도서의 평야 지역에서 등짐장수들이 쓰던 지게이다,

    선질꾼의 복장은 흰 광목 바지, 저고리에 흰 광목으로 허리에 띠를 매었으며, 머리에는 패랭이 대신 흰 광목천으로 넓게 수건을 만들어 메고 다녔다. 양말 대신 흰 광목으로 누 런 물을 들여 감발(발 싸개)을 하고 다녔다.


    ■ 선질꾼 생활을 하였던 윤홍병(1919생) 물치리 대한노인회 회장의 진술 

    199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한 『강원도  시장  민속』의  양양군  편에  있어서  소개되었다.

    ‘해방 전후로 물치장은 잘되는 장이었다.(중략) 한편 서면 서림리 장은 해방 무렵에 없어졌다. 현북면 기사문리의 시장은 해방 이후에 북한 통치 시절에 조금 서다가 없어졌 다.(중략)

    옛날에는  인제장(또는  원통장)→양양장→물치장→다리바우장(고성군  교암리)→간성 장의  순으로  다녔다. 그때  보따리  장사꾼이  있었는데  이를 “바지게  꾼”또는 “선질 꾼”이라고 불렀다.

    선질꾼은  생선  파는  장사꾼인데  품목은  생선과  소금이었다. 바지게꾼은  인제  쪽에 서 곡식을 가져와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

    선질꾼은  전문적인  장사꾼이  아니라  생계의  유지를  위한  '물물교환'의  역할을  해준다. 즉 봄철에 먹을 것이 없을 때 선질꾼이 주로 활동하여 바꿈이를 하는 것이다.

    나(제보자)는  이와  같은  선질꾼을  16세인  1935년에  시작하였으며  10년  정도  하였 다. 당시에 생계는 매우 어려웠으며 결혼은 20세에 하였다.

    (중략)보통  하루에  짐을  지고  120리  정도는  걸었다. 당시에  출발할  때는  1∼2명  정 도였지만, 큰길로  가면  여러  명이  되었다. 40세까지도  선질꾼을  하는  사람이  있었 다.(중략)’

    선질꾼이  양양에서  인제로  갈  때는  어물  종류인  고등어·소금·미역  등, 특히  소금 에  절인  고등어를  많이  갖고  가고, 인제에서  올  때는  주로  콩·팔  등  밭곡식을  가지고 왔다. 가고 오는 중간에서 숙식은 주막에서 해결하였다.

    콩의  경우에는  주로  메주를  만드는  용으로  사용되었다. 힘이  좋은  선질꾼의  경우 한 번에 고등어 50손(100마리)과 소금 한 가마니를 지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선질꾼은  자체적으로  물건을  사고  옮기며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대개  물산(物産) 객주(客主)에  고용되어  물건을  옮겨주고  얼마씩  품값을  받았다. 객주는  사람을  두고, 그 지역의 집마다 방문해서 팔든가,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