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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신증동국여지승람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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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불우. 낙산사(洛山寺) 오봉산에 있다.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이다. 대웅전 위에 전단관음상(栴檀觀音像) 하나를 봉안하고 대를 이어 높이 받들었는데, 영험이 있었다. 우리 세조(世祖)가 이 절에 행차하였 다가, 전사(殿舍)가 비좁고 누추하다 하여 신축하도록 명하여, 매우 굉장하여졌다.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 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 (元)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의 종[奴]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明宗) 정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

     

     고려 유자량의 시에, “바다 벼랑 지극히 높은 곳, 그 가운데 낙가봉(洛迦峯)이 있다.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넓은 문은 봉해도 봉한 것이 아니다. 명주(明珠) 는 내가 욕심내는 것 아니며, 청조는 이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다만 원하노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 뵈옵는 것을.”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대성의 원통(圓通)한 지경은, 일찍이 바다 위 봉우리라 들었네. 불은 (佛恩)은 감로와 같이 젖고, 향은 자니(紫泥)로 봉한 것이 있다. 유(類)에 따라서 몸은항상 나타났으나, 미혹에 잠겨서 눈으로 만나지 못한 것일세. 참인가 거짓인가는 말할것 없고, 다만 자애로운 모습에 배례할 뿐일세.” 하였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한번 해안 높은 곳에 등림하고서는, 머리를 돌리니 티끌 근심 없어졌노라. 대성의 원통한 이치를 알고자 하면, 성낸 물결이 산 밑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것일세.” 하였다.


      김극기 의 시에, “다행히 묘경(妙境)을 찾아 떠돌던 몸을 머무르니, 생각이 맑아지고 보는 것이 그윽하여 만 가지 상념(想念)이 없어진다. 물결 밑의 달은 누가 위아래를 분간하리, 봉우리 끝 구름은 저절로 서동(西東)을 차지한다. 금당(金堂) 속 가짜 상을 잠깐 보았을 제, 석굴(石窟) 속 참 몸을 벌써 보았노라. 대사를 도와 7일 재계(齋戒)함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의 마음은 원에 응해 먼저 통했으리라.” 하였다.

    관음굴(觀音窟) 오봉산 밑에 있다.

     

      우리 익조(翼祖)께서 정숙왕후(貞淑王后)와 함께 여기 에 와서 후사를 점지하도록 기원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와서 알리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은 선래(善來)다.” 하였다. 얼마를 지나서 도조(度祖)를 낳으므로드디어 선래라 이름 하였다. 

    영혈사(靈穴寺)ㆍ사옹사(四擁寺) 모두 설악산에 있다. 도적사(道寂寺) 정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부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성안에 있다. 동해신사(東海神 祠) 부 동쪽에 있다. 봄가을 나라에서 향축을 보내 치제한다. 여단 부 북쪽에 있다.


    고적. 권금성(權金城) 설악산 꼭대기에 있으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1백 12척이고 높이는 4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예전에 권씨 김씨 두집이 여기 에 피란한 까닭으로 이름하였다.”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 나라 군사가 우리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방어하였다.” 한 곳이이곳인 듯하다.

    냉천(冷泉) 오봉산 밑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관음보살이 계집으로 화해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냉천 물을 마시면서 함께 장난을 하였다.” 한다.


     정추의 시에, “바닷가 산이 밝은 세상 되기 전부터 왔는데, 금년까지 몇 번이나 흥망을 보았나. 가을빛이 온 들에 젖어 붉은 벼가 수북하고, 해가 오봉산에 비쳐서 붉은 연기 오른다. 덕녀(德女)의 옛터엔 잔디가 섬돌을 덮었고, 원효의 남긴 자리에는 나무가하늘에 닿았다. 누에 올라 상사(相思) 꿈을 맺고자 한다면, 꿈속에도 응당 냉천을 잔질하리라.” 하였다.

    오색역(五色驛) 부 서쪽 4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