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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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기미) 맑음. 나도 재계가 끝났고 대옥도 제소(祭所)에서 돌아왔다. 나더러 동해신묘비문(東海神廟碑文)을 지으라고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작별을 고했는데, 그날 모두한번 실컷 즐기고 싶었으나 마침 관사(官事)가 바빠 부득이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에 간성 군수 윤군이 행리 속에서 꺼내 온 술과 안주로 몇 순배 돌리고 각기 파했다. 스님사눌이 나를 보러 왔기 에 내가 시로 답하였다.
휘황한 해와 달은 오랜 세월 빛나고 輝煌日月千秋色
높고 넓은 산과 강은 만국이 모양이네 嵬蕩山河萬國容
만약에 모든 것이 고요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若道寂然爲究意
불전에서 종을 어찌하여 친단말이오 佛前那用打鳴鍾
스님 사눌은 하직을 고하고 떠났고, 정극가는 강릉(江陵)을 다녀오기 위해 뒤에 머물렀다. 우리 일행이 서로 헤어지려 할 때 중들이 나와 전송하였는데, 모두 작별하기 아쉬워하는 빛을 보였다. 동구 밖을 나와 설악산을 바라보며 15리 남짓 가서 신흥사(神興寺)에 들렀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동구 밖까지 환영을 나왔다. 그 절은 설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전각(殿閣)이나 헌루(軒樓)가 역시 규모가 큰 사찰 중의 하나였고, 여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깎아지른 봉우리와 가파른 산세는 마치 풍악(楓岳)과 기걸함을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여기에 있는 육행(六行)과 쌍언(雙彦)이라는 스님은 다 얘기상대가 될 만하여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외삼촌을 모시고 유군과 함께 견여로 5, 6리쯤 가 앞 시내의 수석(水石)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날 대옥이 심부름꾼한 사람에게 술과 안주를 보내왔기에 편지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극가에게 부탁하여 금강산에서 얻었던 소마장(疏麻杖) 하나를 허미수(許眉叟)에게 가져다 드리도록 했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금강산중이 말하는 산마(山麻)라는 것으로 색은 청록색이고 재질은 옹골지며 매끈하고 가벼워 지팡이 감으로 좋았다. 그런데 그것을 산마라고 하지만초사(楚辭)에 이른바, ‘소마(疏麻)를 꺾음이여, 백옥같은 꽃이로다’라고 한 그것이 아닌가 싶어 드디어 소마로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극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땡땡한 녹색 옥장을 鍧鍧綠玉杖
저 금강대에서 다듬었지 斲彼金剛臺
그대 통해 노인께 드렸지만 憑君奉老子
돌아올 때 풍뢰 조심하게나 歸路愼風雷
유군도 대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극가가 시와 함께 이름을 그 밑에다 적었으나 그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날 밤 최간이(崔簡易)의 낙산시 운자로 절구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주었다.
동쪽 태산 남쪽 형산 나라가 명산이라 東岱南衡海內奇
공자도 주자도 마음 같았으리 仲尼元晦共心期
그 뉘라서 알았으랴 천 년 후에 이 땅에서 誰知千載東溟外
그 풍경 구경하고 짧은 시를 읊을 줄을 無限雲波屬短詩
이렇게 쓰고서 내 말이 “이 시는 표현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아 손질을 좀해 달라는 것이네.” 하였다.
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뒤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중 하나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다가 침침해서 멀리 볼 수는 없었다. 그 절 벽상 에 기(記)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기 를 보니 다음과 같다.
“이 굴은 의상(義相)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부상(扶桑)을 바라보면 망망한 큰 바다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하고,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안에 죽 들어온다. 안개 낀 동정호(洞庭湖)의 물결이 제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일천 겹옥 같은 봉우리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고, 여산(廬山)이 비록 도인(道人)들이 앞다투어 찾는 곳이라지만 역시 만경창파는 없는데, 여기는 그 모두를 다 겸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승경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비좁고 암자 모양도 왜소하여 경치 좋은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중들 말에 의하면 몇 해 전에는 수계(守戒)하는 중이 하나있었는데 어느 포악한 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장주(莊周)가 이른바, ‘안으로는 수련을 쌓아도 겉은 표범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이학(異學)의 무리들은 인간과 유리 되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 하기 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당해 마땅한 것이다.
그 굴 뒤로는 지상에서 몇 천 길 높이로 석부용(石芙蓉)이 치솟아 있는데 서쪽에서 달려온 것으로서 기기교교한 형상의 봉우리가 40여 개나 되었다. 어떤 것은 검극(劍戟) 같고, 어떤 것은 규벽(圭壁) 같고, 어떤 것은 종정(鍾鼎) 같고, 어떤 것은 기고(旗鼓) 같고, 어떤 것은 불꽃이 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아 모양이 제각기 형형색색이고, 중간의 한 봉우리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풍악의 혈망봉(穴網峯)처럼 생겼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비바람이 있으려면 미리 울기 때문에 천후(天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계조(繼祖)라고 한 것도 아마 이 산의 조산(祖山)이 풍악을 닮았다는 뜻아니겠는가.
견여를 타고 산에서 내려와 미시령(彌時嶺) 아래 계시는 외삼촌 뒤를 좇아왔다. 재에 와서 재 아래 있는 여러 고을들을 내려다보며 내가 유군에게 이르기를, “영동(嶺東) 한 구역을 옛날에는 창해군(滄海郡)이라고 불렀다. 장자방(張子房)이 이르기를, ‘동으로 가 창해국 임금을 뵙고 거기에서 역사(力士)를 만나 진시황에게 철퇴를 던지게 됐다.’고 했다 하니, 아마도 그가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했었다. 또 견여를 타고 재를 넘어오는데 재가 높고 험해 걸음마다 마치 사다리와 같은가파른 바위가 거의 30리나 뻗쳐 있었다. 난천(煖泉) 가에 와서 말을 쉬게 했는데, 이른바 난천이란 겨울에도 얼지 않아 길 가는 사람들이 눈에 막히고 해가 저물면 반드시 거기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연도에는 꽤 아름다운 수석들이 있었으나 이미 풍악과 낙가(洛伽)의 승경을 구경한 우리들 눈에는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큰 바다나 높은 산을 구경한 자에게는 어지간한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인(聖 人)의 문에서 노는 자에겐 도술(道術)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재 위에 군데군데 옛 성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고장성(古長城)인 것으로 금강산ㆍ설악산 정상에도 그러한 곳들이 더러 있었다. 우리나라 삼국(三國) 시절에 피란 나온 이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모여 있으면서 서로 버티던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3백여 년 태평을 유지하는 동안 성 단속을 하지 않았다가 중간의 왜놈 난리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도망만 치다가 결국 문드러지고 말았다. 지금도 병진(兵塵)이 일어나지 않은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 태평 뒤에는 비운이 반드시 오는 법이어서 염려가 안 될 수 없다.
도중에 천후산 흔들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賦)를 지었다.
천후산 앞에 큰 바위 하나 어디에서 떨어져 계조암(繼祖菴) 가에 있을까.
한 명이 흔들어도 흔들리지만 옮기려면 천 명 가지고도 안 될 바위.
어찌보면 우(禹)가 구독(九瀆)을 뚫고,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택(九澤)을 쌓고,
사경(四逕)의 물길을 낸 다음,
구주의 쇠붙이를 모아 만들어놓은 솥 같기 도 하고,
또 진시황(秦始皇)이 이주(二周)를 삼키고 육왕(六王)을 죽이고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오랑캐까지 제어한 다음,
천하 병기 를 모두 녹여 주조한 종(鍾)과 같기 도 하다.
그러나 솥이라고 해도 상제(上帝)께 술 한 잔 올릴 수도 없고,
종이라고 해도 꽝꽝 울지도 못한다.
기껏 중들만 이곳을 이용하여 절로 꾸며 두고,
구경꾼들만 그를 두고 별소리 다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월출산(月出山) 꼭대기에 바위 아홉 개가 있었는데 중화 도사(中華道士)가 서에서 와서 그 중 여덟 개를 쳐 없애버렸다고 들었지만,
나도 두보(杜甫)가 말했듯이 맹사(猛士)의 힘을 빌려 그를 들어다가 저 하늘 밖에다 던져버림으로써 사특한 말 편벽한 행동이 판치지 못하게 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찢어지고 귀신들이 울부짖고 미워하면서 갱혈(坑穴) 속에 가만히 있지 못할까 봐서 머뭇거리며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탄식만 한다.
장자방을 데리고 창해군(滄海君)을 찾아가서 역사(力士)를 만나 300근 철퇴를 옷소매에 넣고 있다가 그를 저격하여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아, 신력(神力)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날은 남교역(嵐校驛)에서 잤는데 마을 앞에서 한계산(寒溪山)을 바라보니 그다지 멀지 않고 또 그 골이 깊고 수석도 기괴하다고 들었으나 가는 길목이 아니고 또 우회 해야 하기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주인의 성명은 함응규(咸應奎)라는 자였는데 우리에게 꿀차를 대접하였다.
또 문자를 꽤 알고 있었으며 점도 칠 줄 알았다.
내가 집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집 안부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걱정 없다고 하면서 옥녀상봉(玉女相逢)의 점괘가 나왔다고 하였다.
19일(신유)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를 무릅쓰고 일찍 출발하여 인제(麟蹄) 원통역(圓通驛)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인 성명은 박윤생(朴潤生)인데 꿀차를 대접했고, 역리(驛吏)들은 술과 과일을 대접했다. 춘천(春川)의 청원(淸源)을 보려고 홍천(洪川) 가는 큰길을 좌로 하고 굽은 시내를 건너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과거보기 위해 떼지어 걸어가고 있는 선비들을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서로 읍을 했는데 그렇게하기를 두 차례나 했다. 시내 하나를 열여섯 차례나 건너 산골의 민가를 찾아 잤는데 아주 궁벽한 곳이었다. 주인의 말이, 자기나이는 70이고 아들이 셋, 딸이 넷인데 금년봄에 굶고 병들어 모두 죽었으며 집안 간에 죽은 자들이 30명도 더 되는데 아직 땅에다 묻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버리고 떠돌이로 나서고 싶어도 자기자신은 그 고을의 토착민이고 아들이 또 어궁졸(御宮卒)이어서 쉽사리 옮겨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이 불쌍했고 산골짜기의 백성들 생활상이 그렇게도 맵고 고통스러워 장초지탄(萇楚之歎)이 없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땅은 인제 땅이었고 마을 이름은 가음여리(加陰餘里)였다.
20일(임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광치(廣峙)를 넘는데, 재가 매우 가파르고 길이 전부돌 뿐이어서 사람이나 말이나 힘들고 괴롭기가 미시령에 버금갔다. 원화촌(遠花村) 윤동지(尹同知) 옛집에서 조반을 먹었는데 윤생 천민(尹生天民)이라는 자가 술과 과일을가져와서 대접했다. 재를 넘고 골짜기를 벗어나니 들판이 매우 넓고 민가 수십 호가 여기저기살고 있었으며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었는데 그 모두가 선비들 집이라고 했다.
윤생의 말에 의하면 윤동지라는 자는 이름은 수(洙)이고 관향은 파평(坡平)인데 그의 증조부가 처음으로 그 곳에 들어와 농사에 주력하여 재산을 이루었고 그 고장에 삼(蔘)이 생산되는데 한 근 한 냥이 아니라 캐면 섬으로 캐기 때문에 가세가 매우 요족하고 곡식도 1만 석을 쌓아 두었다가 병자년 난리에 싸우러 가는 북로군(北路軍)이 모두 그곳을 지나게 되어 그 군대들 먹을 것을 전부 그가 대었고,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그에게가선(嘉善)의 품계를 내렸다고 하였다. 난리로 인하여 세상이 그렇게 어지러울 때 자기 사재를 털어 국가의 다급함을 돕는다는 것은 복식(卜式)과 같은 사람인데, 국가에서 그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영직(影職)이나 공함(空啣)뿐이니 그래 가지고서야어떻게 충성을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할 것인가. 더구나 그 사람으로 말하면 자기자력으로 치부하여 그 고을에서 우뚝하게 솟았고 또 자기의 힘이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게하였으니 그만하면 재질로나 힘으로나 기릴 만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사람 쓰는 것은 꼭 쓰일 사람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쓰였다고 해서 꼭 쓸 사람도 아니어서 그 역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날 수인천(水仁遷)을 지났는데 매우 땅으로 위험한 길이 거의 10여 리나 되었다.
수인역 마을에서 잤는데 그 곳은 양구(楊口) 그날은 70여 리를 온 셈이다. 내가 역리한 사람과 얘기해 보았는데 내가 말하기를,
“이 고장은 지대가 궁벽하고 산이 깊어 산삼이 날법하다.”
했더니, 그 역리 말이,
“이 고장에 물론 산삼이 나지요. 그러나 근년 들어 유랑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는 바람에 산택(山澤)이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고 또 남아난 재목도 없어 옛날과는 딴판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다가 내가 말하기를,
“내가 산중을 다녀 보니까 금강산도 내산 외산 할 것 없이 모두 황무지 개간한답시고아무리 높은 데도 다 올라가고 아무리 깊은 곳도 다 들어가 초목도 자라지 못하여 새짐승도 붙어 살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서는 고기 못 먹고 가죽옷 입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집도 잘 지을 수 없고, 생활의 변화를 도모할 수도 없고, 의약(醫藥)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죽어서는 널마저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어, 그로 인한 재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부역(賦役)과 형벌을 피해 다니며 국가로 하여금 저들을 기속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단 무슨 경급(警急)이라도 있으면 서로 모여 도둑으로 변해버리고 마니, 참으로 국가의 간민(姦民)인 것이다. 고을 수령들이 그 피해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이 원적(元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세 이외의 수입을 노려 그들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그들 요구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 폐단이 자꾸 번지고 있는 원인이 바로 거기 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숲을 모두 태우거나 베어 내어 토석(土石)이 전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장마라도 한번 지는 날이면 모두 무너져 흘러내려 산은 산대로 깎이고 시내와 평원은 막히고메워져서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던 산과 물이 깊던 못들이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새와 짐승은 다 도망가고 물고기도 자라도 자리를 옮겨 근세 이후로토지는 더욱 척박해지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에 찌들리며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말라비구름도 일지 않고 수재 한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 모두가 사람들이 살피지 않아서 그렇지 다 원인이 있어 그리 된 것이다. 그대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하였다. 유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 그것을 금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 것인 기가?” 하 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만약 호구(戶口) 정책을 엄하게 하여 떠돌이의 길만 막는다면 옛날처럼 위 아래로 풋나무 새 짐승까지도 다 제 삶을 즐기는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를 다 설명하자면 말이 기네.”
했더니, 역리가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상객(上客)의 말씀이 옳습니다. 꼭 할 말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산에 들어가 경작하는 자들은 참으로 국가로 보아 간교한 백성들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산골 백성들이 더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21일(계해) 아침 날씨가 음산하더니 이어 가랑비가 내렸다. 조반 후 출발하여 부창현 (富昌峴)을 넘어 부창역 마을에서 말에게 꼴을 주었다. 가랑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기락이천(祈樂伊遷)을 지났는데, 기락이는 방언으로 기어서 나온다는 말로서, 그 천의길이 너무 좁고 또 바위 구멍이 있어서 누구나 그 곳을 가는 자는 반드시 기어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泉田)의 길가 큰 시내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날은 하루 내내 산골 험한 길만을 걸었는데, 여기에 이르자 산들이 확 트이고 그 가운데 큰 평야가 펼쳐 있었으며 강물이 굽이치고 돌아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북쪽을 바라보니 높다란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 민가 수십 호가 있었으며 뒤에는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느릅나무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데 유군의 말로는 강릉 부사 (江陵府使) 이후(李煦)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시냇가에 작은 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생 후평(李生后平)이 집에 있는가 물었더니, 지금 양양(襄陽)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여 리를 가면서 북으로는 청평산(淸平山)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소양정(昭陽亭)을 가리키며 오다가 배로 앞강을 건너 소양정에서 잠시쉬었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월봉(月 峯)ㆍ청음(淸陰)ㆍ백헌(白軒) 그리고 유창(兪㻛)의 것을 보고 드디어 춘천(春川) 읍내로들어와 유군 종의 집에다 여장을 풀고 주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주수는 병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비장(裨將) 신완(申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주수의 형 이생 석 (李生錫)이 왔고, 또 최남(崔男)의 아들 상인(喪人)인 이억(爾嶷)도 왔으며, 이생을 통해서울에 있는 집안 소식도 대강 들었다. 유군이 이르기를,
“듣기 에 청평산에 이자현(李資玄)의 식암 영지(息菴影池)가 있다는데 식암은 자현이 홀로 앉았던 곳으로 동사(東史)에 이른바, ‘둥글둥글하기가 곡란(鵠卵)과 같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영지는 식암 아래 있는 겨우 반묘(半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못으로, 해 뜨는아침, 달 돋는 밤이면 식암의 풍경과 사람의 동정까지도 모두 그 못 속에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현이 죽었을 때 불가의 법대로 화장을 하여 불에 탄 그 뼈를 아직까지 그곳 중이 간직하고 있는데 빛이 푸르른 청옥(靑玉)과 같다. 그리고 용마루에는 또 김열경(金悅卿) 친필이 있다. 그래서 신상촌(申象村)의 송인시(送人詩)에, ‘이자현 유골은 풍류가 대단하고[李資玄骨風流遠], 김열경 글씨는 유일의 자취로세[金悅卿書逸躅存]’라고 하였으니, 그 모두가 다 값진 고적들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영탄(咏嘆)했으며, 열경(悅卿)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 지 않았던 뜻을 높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 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
라가야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 상진(尙震)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하나에다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공이 한참 구경하 다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 劣)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공이 농부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지요.’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을않고 지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을보고 그 놈을 부려먹으면서 그 놈 부족한 점을 꼬집어 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고 그때부터는 한평생 남의 과실 말하기 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았 으므로 마침내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2일(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이 모양은 매우그럴싸했으나 거민이 100호도 안 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지는 못 되었다. 만약 삼악산(三岳山)에다 관(關)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保障)이 될 법했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주수가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주었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新淵)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戶)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동행하게 되었다. 석파령(席破嶺)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三岳)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郡)까지의 거리는 20여 리였다. 거기에서 또 20리를 더 가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 묘가 있었고, 그 아래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이 날은 춘천(春川)을 떠났다. 이는 대개 청평산에 들어가 진락옹(眞樂翁)과 매월당 (梅月堂)의 유적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 유군 에게 화답을 청했다.
춘주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을인데 春州素號水雲鄕
더구나 청평학사 별장까지 있음이랴 况有淸平學士莊
청연에 물이 고여 둥실둥실 배 떠있고 水積靑淵舟泛泛
구름 덮인 화악에는 바위 빛이 푸르다네 雲霾華岳石蒼蒼
희이자 뼈 푸르다니 신선 상징 분명하지 希夷骨碧仙蹤杳
매월당이 남긴 글씨 그 체취가 풍긴다네 梅月書留道韻長
서운하게 식암 영지 바라만 본단 말인가 惆悵菴池空入望
그들이 남긴 향기 누가 가서 맡으라고 澗蘅誰復嗅遺香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주(州)의북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바위 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유군의 화답시는 다음과 같다.
진락공 그 명성이 이 고을에 자자한데 眞樂公名表此鄕
더구나 청평하면 그 있던 곳 아니던가 淸平況是故時莊
예스러운 못과 누대 지원처럼 경개 좋고 祗園勝槪池臺古
보지의 가을 풍경 나무들이 푸르러라 寶池秋容樹木蒼
치솟은 바위산과 겨룰 만한 높은 절의 淸節漫爭山骨聳
고상한 풍류는 장강유수 그것이라네 高風直與水流長
선구를 지척에 두고 계획이 틀려서 仙區咫尺違心賞
선생께 판향 하나 피워 올리지 못한다오 未薦先生一瓣香
23일(을축) 새벽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가평(加平) 길을 거쳐 초연대 (超然臺)를 지나면서도 안개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지 못하였다. 가평읍 아래 와서 조반을 먹고, 아현(芽峴) 남쪽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청평(淸平) 언덕을 지나 굴운역 (屈雲驛) 마을에서 잤는데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의 형세가 매우 좋아 보여 올라가서 종을 시켜 치표(置標)를 해 두게 하였다. 그 주산(主山)의 이름을 물었더니 청취전 (靑翠田)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운등산(云登山)이 되고 거기 에서 또 동으로 달려가다가 회강(淮江)을 만나 거기에서 멎었는데 곱게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장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24일(병인) 흐렸다. 일찍 출발하여 천괘산(天掛山)을 향하여 가다가 마치현(摩蚩峴)을넘어 그 고개 서쪽에서 조반을 먹고 여러 사람 무덤들을 가리키고 물어가면서 길을 가는데 시내 곁 단풍잎들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았다. 대개 평천(平川)의 가을 빛이 이제 와서야 비로소 무르익고 있었다. 풍양(豐壤)에 당도하여 왕숙천(王宿川)을 건너고 퇴가원(退駕院)을 지나 오릉(五陵) 밖에서 쉬노라니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이 보이기시작 했다. 들은 넓고 시내는 편평하여 새삼스러운 감회가 있기에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만 겹이나 푸르른 봉래산을 꿈에 보고 夢入蓬萊翠萬重
구름 따라 동쪽 땅을 한 바퀴 다 돌았네 一笻東盡白雲求
아침이면 넓은 바다 부상의 해를 보고 朝看滄海扶桑日
밤에는 비로봉 가을 나무에 의지했다네 夜將毗盧碧樹秋
자장처럼 호탕하게 놀자는 뜻 아니었고 不因子長疏宕擧
나그네 모진 시름 달래려고도 아니었네 非關楚客慍惀愁
돌아와서 동산에 다시 올라 바라보니 歸來更上東山望
끝도 없는 연파가 한강 섬에 자욱하네 無限煙波江漢洲
늦게야 성안에 들어와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외삼촌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무사히 돌아왔음을 고하였다.
풍악(楓岳)의 경치가 삼한(三韓)에서 으뜸이요 천하에 소문이 나 있어 내 늘 사영운 (謝靈運)처럼 나막신을 장만하여 사마자장(司馬子長)같이 한번 마음껏 구경을 해보려고벼르기는 했으나, 세상일도 뜻대로 되지 않고 병마에도 시달리다 보니 속절없는 풍진 세월에 흰머리가 이미 머리에 가득해갔다. 임자년 7월 내가 동성(東城)에 부쳐 있으면서 마침 유동(楡洞) 사시는 통제사 외삼촌과의 자리에서 옛 친구 정극가를 뜻밖에 만나 담소하던 차에 산수(山水) 구경 얘기가 나왔다. 외삼촌 말씀이,
“내가 진작부터 관동(關東) 구경의 뜻이 있었으나 몸이 무부(武夫)라서 미처 못했었는데 지금 마침 집에 있게 되었으니 구경갈 때는 바로 이때다. 극가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가?” 하자, 극가가 대답하기를,
“그렇잖아도 지금 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인데 안 가다니요.”
하였다. 외삼촌은 또 나더러도,
“너도 이번 걸음에 불가불 동행을 해야겠다.”
하시기에, 나 역시,
“가구말구요. 그것이 저의 평소 원이었는데요.”
하고, 드디어 중도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그 해 윤월(閏月) 정유일에 침석정(枮石亭)에서 내가 외삼촌과 만나 동소문을 출발했는데 유군 여거(柳君汝居) 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뒤좇아 왔다. 연산(漣山)에 가 미수(眉叟)에게 문안하고 석록 (石鹿)에서 극가를 데리고 그로부터 9일 만에 풍악의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이틀 밤을정양사에서 자고 천을대(天乙臺)를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옮겼다가 안문(鴈門)으로 나와 남천(南川)을 끼고 동으로 갔었다. 유점사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산영루(山暎樓) 를 산책하고 만경대(萬景臺)를 바라보았으며 맑은 가을의 운물(雲物) 등 온갖 경치를 두루 감상하였다.
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산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경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유담(仙遊潭)ㆍ영랑호(永郞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夢□)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ㆍ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경한 곳을 적어 옛 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 에 나의 영귀(詠歸) 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枮石亭)에서 쓰다.
『白湖全書』 卷之三十四, 雜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