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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시문

    윤휴(1)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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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풍악록(楓岳錄)』        백호(白湖) 윤휴(尹鑴) 45)


    1672(임자)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풍악(楓岳)으로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출발하여 통제사(統制使) 외숙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주역』 두 권과 일기책 한 권뿐이다. 일행들의 필요한 여행 도구를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숙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서 너무 오래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숙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樓院)에서 말에 먹이면서 지나가는 스님 덕명(德明)을 만났다.

    그 스님은 일찍이 풍악산 유람을 하여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다. 늦어서야 양주읍(楊州邑)에 도착하여 외숙은 양주 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있었는데, 양주 목사 이원정(李元禎)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여거(柳汝居-이름은 光善)도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숙을 통해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당(序堂)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正字) 이담명(李聃命)이 찾아왔고 고을 아전(州佐) 우(禹)와 한(韓)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25일(무술) 맑음. 양주 목사 부자(父子)가 또 찾았다. 아침에 출발하여 무성(蕪城) 고개를 넘어 감악산(紺嶽山)을 바라보며 가면서 유군(柳君)과 함께 홍복(弘福)ㆍ고령(高靈) ㆍ도봉(道峯)ㆍ불암(佛巖) 등지를 가리키기 도 했다.

    입암(笠巖) 율정(栗亭) 아래서 말에 풀을 먹인 후 일행과는 일단 갈라섰다. 나는 송형석우 계신(宋兄錫祐季愼)이 살던 곳을 묻고 송군 욱(宋君澳)의 초당에 들렀더니 매화나무, 대나무는 옛날 그대로이고 벽에는 내가 몇 해 전에 써 준 기문(記文)과 허장 미수 (許丈眉叟)가 쓰신 기 (記)가 걸려 있어 읽어보니 지난날의 회포가 일어 눈물이 글썽했다. 

    송군 제(宋君濟) 부자를 다 조문하고 일행을 뒤쫓아 간파령(干波嶺) 아래서 만났다. 차근연(差斤淵)을 건너서는 유군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 가다가 저물어 신릉(新陵) 정극가(鄭克家) 산장에 당도하여 함께 잤는데, 자해(紫蟹) 홍주(紅酒)를 마시며 서로 흔쾌하게 보냈다.


    26일(기해) 맑음. 정극가와 출발은 함께 했으나 길이 달랐다. 나는 진수동(眞樹洞)으로 참봉 이언무 자는 경윤(景允)을 찾아가서 그의 세 아들 태양(泰陽)ㆍ태징(泰徵)ㆍ태륭(泰隆)과 윤세필(尹生世弼)을 만났다.

    윤생은 이 참봉의 이모 아들로 우리 남원(南原) 윤씨라고 하였다. 이생 태양이 나를따라왔다. 군영동(群英洞)에 이르러 허미수(許眉叟) 어른을 뵈었는데 일행들은 먼저 와있었고, 미수 어른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허함(許生)ㆍ송직(宋生溭)ㆍ정태악(鄭生泰岳)을 만났다.

      미수 어른은 서실로 나가고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는데 초가집에 온갖 화초가 그윽한 정취를 풍겼다.

    미수 어른이 두류산(頭流山)ㆍ오대산(五臺山)ㆍ태백산(太白山) 등의 기록과 허암 정희량에 대한 글과 아들이 부친의 상복을 대신하여 입은 것에 대한 편지글 등을 보여주었다. 나는 일찍이 지은 선계설(禪繼說)로 답하였다.


    또 짐 꾸러미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아 몇 순배 대작한 후 섬돌 위에 있는 일월석(日月石)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석경(石鏡)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해와 달 그림자가 석면에 훤히 비쳤으며 미수 어른이 손수 그 세 글자를 조각했다고 한다.

     이야기도중 길을 떠나는 정표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허락하고 또 전서 (篆書)로 광풍제월(光風霽月) 낙천안토(樂天安土) 수명안분(受命安分) 이렇게 열두 자를 써 주어 유군과 나눴는데 유군은 수명(受命) 이하 네 글자를 차지했다. 늦어서야 하직하고 출발하였다.-중략- 이 날 어부가 금방 잡아온 생전복과 대구(大口)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전복은회치고 대구는 삶아 먹었다. 또 막걸리까지 사다가 즐기었다. 달 놀이를 마치고 정사(亭舍)로 돌아와 묵었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침 햇살에 먼지 한 점 없더니 旭日氛埃滅 

    가을바람에 큰 파도 일어 秋風大海波 

    다시 태산이라도 오르는 기분으로 還將登岱興 

    다시 달빛 아래 뗏목에 올랐었지 更上月邊槎


    유광선과 정극기에게 말해주며 화답하라고 하였다.양양(襄陽) 부사가 관인(官人)을 시켜 우리 일행을 탐문하였다.


    13일(을묘), 새벽에 일어나 일출 광경을 보려는데 구름이 가리고 있었으나 구름과 해가 서로 엇갈리면서 바람에 황금빛이 비추니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에 매우 좋았다. 길 중간에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황죽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대의 크기 는 모두 화살 감이었으며 바다 속의 섬들도 모두 푸르른 황죽 숲이었다.

    노포(蘆浦)에 와서 호수가 터져 건널 수가 없어 뱃사공으로 하여금 바다의 배를 끌어다가 건넜다.

      내가 보기 에 동해에 있는 배들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것이 마치 말구유 모양이고 몸통도 매우 적은데 그래야 배가 파도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큰 배 한 척을 보았는데 모양이 서해(西海)에서 부리는 배 같았고 모래 위에 정지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 말이 동해에는 그렇게 생긴 배가 없고지난 큰 흉년 때 영남(嶺南) 백성들이 살 길이 없자, 그 배로 고기 잡고 해초라도 캐기 위해 파도를 무릅쓰고 동해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들은 동해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활을 꾸려가자는 속셈이었다. 파도에도 역시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하였다.

     내 그들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동해의 작은 배들은 그것이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들 쓰기 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지만 저 큰 파도는 큰 배가 아니고서는 건널 수가 없다.

    나라에서 동해에는 파도가 거세지 않다 하여 관(官)의 힘으로 큰 배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에는 큰 배가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지난 흉년 때 들어왔다는 저 배를 놓고 보더라도 동해ㆍ서해를 배로 통행할 수 있음을 알지않겠는가.

    그날은 또 염막(鹽幕)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방법을 들어가서 보았는데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서해와 다르고 소금 맛도 너무 써서 음식을 만들면 달고 맛있는 서해 소금보다 훨씬 못하였다. 서해안의 소금 만드는 방법을 동해안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또 따뜻한 날씨에 동남풍이 불어 바닷물이 잔잔한데 가끔 고래가 나와 노는 모습이 보였다.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면 눈발 같았으며 소리는소 울음소리 같았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고기로는 고래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또 황수차(黃水差)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서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고래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황수차는 꼭 떼를 지어 다니다가 만약 고래를 만나게 되면수컷 하나가 지휘자로 뒤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번갈아서 나가게 하여 꼭 죽여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종류별로 서로 제어를 하고 또 싸우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니 그 역시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20여 리를 더 가 건봉(乾鳳) 하류를 건너 낙산(洛山) 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산등성이로 올라 얼마를 더 가서 절 문간에 들어서니 스님들이 견여를 메고 나와 맞이했다.

     견여를 물리치고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올라 앉아 있었다. 정자는 절 문간 밖에 있었는데, 그 절의 문정(門庭)이나 헌각(軒閣)이 웅장하여 바로 하나의 큰 아문(衙門)이었다. 절은 설악산을 등진 채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세가 편평하며 넓고 건물도탁 틔어 넓었다. 당(堂)에 올라 보니, 금벽(金碧) 장식이나 용마루 등의 높이는 비록 장안사ㆍ유점사 등만 못해도 대문과 담의 꾸밈새나 전망이 좋기 는 그 두 절이 따라오지못할 정도였다.

    양양 태수 이대옥(李大玉)이 온다는 시간에 오지 못하고 한참을 기 다린 뒤에 왔서 우리들이 옛날 산당(山堂)에서 있었던 일처럼 스님들로 하여금 북을 울리게 하여 그가 시간에 오지 못한 것을 장난삼아 책하고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는데 대옥이 술과안주를 차려가지고 와 함께 마시며 즐겼다.

    얘기도중 극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성 태수(高城太守)는 이 좋은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서, 천리 멀리 구경 나온 서울의 사우(士友)들을 만났는데도 서로 위로하는 술 한 잔도 없으니 그 어디 풍류 있는 태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 일은 배울 일이 아닙니다.” 하자,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고성 태수는 천성이 원래 깔끔해서 애당초 그 생각을 않은 것뿐이지 정의가 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네.”하였다.

    내가 뒤이어 말하기를, “자신이 깔끔하기 때문에 남을 대우하는 것도 냉랭하게 하는 것이 물론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주식(酒食)에 빠져 그칠 줄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훨씬 더 고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야 술 속의취미도 알아서 사람을 운치 있게 대우하는 것이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야 마치 기와조각을 물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고 차분할 때가 없는 것인데 남이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이며, 또 그런 분과 어떻게 호산(湖山)의 승경을 논할 만하겠습니까.”하였다.

    그때 좌중에 술을 마시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 서로 한바탕 웃고나서 다시 한잔씩 들고는 밤이 깊어 파하고 함께 선당(禪堂)에서 잤다.

    내가 시 한 수를 읊어 대옥에게 주니 대옥도 화답하였다.


    구름 드리운 설악은 삼천 길이요 雲垂雪嶽三千丈

    달 솟는 동해는 구만 길이로다 月湧東溟九萬尋

    오늘 이화정에서 가진 모임에 今日梨花亭上會

    아양곡 한가락은 벗의 마음이구나. 峩洋一曲故人心


    이상은 내 시인데, 그날따라 하늘이 비가 내릴 듯 설악산 절반을 구름이 가리고 있었고 달이 중천에 오르자 비로소 빛이 있었다. 또 좌중에는 현금(玄琴)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기에 시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대옥의 화답시는 다음과 같다.


    홀로 높은 대에 올라 신선세계를 바라보나    獨上高臺望仙子 

    봉래섬 아득하여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蓬島微茫何處尋

    거문고에 실어보는 아양곡 한 가락에   惟有峩洋琴一曲

    두 사람 마주 앉은 백년의 마음이네 兩人相對百年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 멀리 이화정에 梨花亭逈海東傍

    술을 들고 오르자 흥이 절로 나네 杯酒登臨引興長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誰道洛陽探勝客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 내가 좌중의 여러 사람들에 게 말하였다.

     “꽃과 버들은 봄빛과는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풍류로는 그만이지만 초나라 군대가 한왕(漢王)을 겹겹으로 에워싸는 날이면 빠져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쩌지?”

    했더니, 대옥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기고 지고는 내 하기에 달린 것인데 가까이 하면 어떤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한 나라 군대가 사면에서 모두 초가를 부르다가 그들이 요란스럽게 장막 아래까지 다가오면 그때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가려 해도 안 될 것이니 내 아주 자리를 걷어가지고 피하고 싶네.”하자, 모두들 웃으면서, 싸움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것은 속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그것은 제군들이 안 보았을 뿐이지 병법(兵法)에 있는 말일세.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아예 패배하지 않을 위치를 택하는 법이야.”

    하고, 드디어 그 자리를 떴더니 유군 하는 말이,

    “그대야말로 성문을 굳게 닫고 철저히 지키는 자로다.”

    하였다. 외삼촌이 하신 말씀이, 

    “내가 자리를 바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께서는 노장이어서 모든 일에 익숙하시기 때문에 패배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서 서로 농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어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옛날 개서막(開西幕)에 부임해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뇌유령(雷有寧)이 바다를 통해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기일이 오래 지나도 오지 않아 원접사(遠接使) 이하 여러 명승들이 모두 모여 20여 일간이나 머무르고 있었지. 그때 원접사는 김신국(金藎國)이었고, 구봉서(具鳳瑞)ㆍ정태화(鄭太和)가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감사(監司) 장신(張紳), 병사(兵使) 유림(柳琳)이 좌음(佐飮)을 위해 남북의 기생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각기20여 명의 예쁜 여인들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너도나도 못하는 짓이 없이 별짓을다했는데, 그 중에는 처음에는 돌아본 체도 아니 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가도결국에는 별 수 없이 한통속이 된 사람도 있다. 그때 조경(趙絅)이 문례관(問禮官)으로 함께 있었는데 그가 평소 청고(淸苦)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공들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그 중에서 예쁜 여인을 골라 조공을 꼭 품안에다 넣도록 당부를 했는데, 조공은 처음부터 난색 하나 보이지 않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날마다 앞에다 두고 부리는 등 모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끝까지 지킬 것을 지켰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그 늙은이의 지조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했다. 그 말끝에 일행 모두가 말하기를,

    “그 늙은이를 혹 경멸하고 헐뜯는 자도 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단계가높은 분이지요.”하였다.


    14일(병진) 새벽에 빈일료(賓日寮)에 나가 일출광경을 보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하늘에비가 올 징후가 있어 붉은 노을이 남북을 통해 하늘에 질펀하였고 만경창파 같은 구름물결이 끝도 없이 하늘을 띄워 보내고 해를 목욕 시킬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하늘 밖에 나가 놀게 만들었다. 조금 후 하늘은 금방 변하여 새벽빛이 다시 짙고 하늘끝도 희미했다. 태양은 비록 뜬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구름이 변화하는 태도라든지 별스럽게 자꾸 바뀌는 모양은 보기에 이채로웠다. 그날은 기일(忌日)이었기에 혼자 빈일료에 앉아서 재계하였다. 늙은 스님 비경(秘瓊)이라는 자를 불러 함께 얘기하다가 최간이 (崔簡易)가 읊었다는 운(韻)자를 들었는데 운자만 있고 시는 없었다. 그 운자에 차운하여 써 주고, 또 벽상에 걸려 있는 홍녹문(洪鹿門)ㆍ정동명(鄭東溟) 운에도 차운하였다.


    낙산사는 동해의 동쪽에 있어 洛寺寺臨東海東 

    부상에서 해가 뜨면 온 하늘이 붉어지고 扶桑出日滿天紅

    절간의 맑은 새벽에 향 피우고 앉았으니 上方淸曉燒香坐 

    상서로운 보랏빛 구름 기운 속에 있는 듯하네 身在祥雲紫氣中


    위의 시는 간이의 운에 차운한 것이다.


    설악산 동쪽 바다 낙가정에서 雪嶽東溟洛伽亭 

    붉은 해가 푸른 하늘로 오르는 걸 보았네 直窺紅日上靑冥

    바다와 산이 다한 곳에 이름난 고장 있어 海山窮處名區在

    육경에 뛰어난 호걸스런 사람 같네 却似人豪出六經


    위의 시는 동명의 운에 차운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차운하였다.


    우주 개벽 어느 때에 열렸나 宇宙幾時闢 

    이 절은 신라 시대에 지었다네 禪宮羅代開

    새는 구름 저 멀리로 사라지고 鳥向雲邊滅

    돛단배 저 하늘 밖에서 오네 颿從天外來

    바람 일자 파도는 태양을 흔들고 風生波盪日 

    늦가을 객은 대에 오르네 秋晩客登臺

    바다 삼 천 리를 돌아보니 遵海三千里

    이 정자가 참으로 장쾌하구나 玆亭實快哉


    또 한 수는 다음과 같다.


    위치는 산하 좋은 곳 차지   地占山河勝 

    창은 바다 쪽으로 향해 있네   窓臨溟海開

    하늘 밖에서 흰구름 일고 白雲天外起 

    붉은 해가 밤중만 온다오 紅日夜中來

    바람은 금선굴 흔들고 風撼金仙窟

    파도는 의상대를 절구질하네 波舂義相臺

    동쪽 가 살고픈 뜻이야 있지만 居夷夙有意 

    나를 따를 자가 누구인가 從我其誰哉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차운하였다. 정동명의 원운(元韻)은, ‘임지로 가는 유열경(柳悅卿) 을 보내며’이다.


    바닷가 정자에 나무마다 배꽃이 만발하고 萬樹梨花海上亭 

    낙산의 바다는 아득하구나 洛山邊海海冥冥 

    관청에 일이 없어 종일토록 한가하니 訟庭竟日閒無事 

    모름지기낙산에서 대제경이나 읽으리라   須讀扶桑大帝經


    하였고, 홍녹문의 원운은, ‘낙산사에서 노두(老杜)의 운으로’인데,


    이곳이 용왕의 집자리인가 地卽龍王宅 

    어느 해에 절이 열었는가 何年梵宇開 

    하늘은 푸른 바다에 떠가고 天浮靑海去 

    산은 백두산에서 왔다네 山自白頭來 

    가을 풍경을 실컷 보고 縱目觀秋色

    석대에 올라 쉬었네 扶笻倚石臺

    여기에 올라 세월의 무상함을 登臨撫今古

    생각하니 이런 일 저런 일 끝이 없어라 俯仰恩悠哉


    했으며, 손홍우 희(孫洪宇煕)는 차운하기를,


    창파가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滄波杳無際

    천지는 언제쯤 개벽되었던가 天地幾時開

    옛 절엔 가을빛이 다해가는데 古寺秋光盡

    모래밭으로 물새들이 오는구나 明沙海鳥來 

    시 읊조리며 옛일 더듬어도 보고 吟詩憶舊迹

    먼 곳 바라보며 누대에 앉았네 騁眺坐寒臺

    황학이 한번 날아가니 黃鶴一飛去

    흰 구름이 왜 그리도 먼가 白雲何遠哉


    하였다. 그리고 그 날 비경이 최간이가 시 두 수를 가지고 왔었는데 그 하나는,


    옛날 누대에서 일출을 바라보면 기이하다고 들었는데 樓觀海日昔聞奇

    달은 한가위 해마다 기간이구나 月得中秋一歲期

    이 날 이 때 장맛비를 만나니 此日此時逢久雨 

    하늘이 날 영동에서 시 쓰라고 잡아 두었네 天公停我嶺東詩


    라고 읊었다. 이 시는 낙산(洛山)을 읊은 것이고, 또 십칠조(十七朝)라는 시는 이렇다.


    높고 높은 하늘 달이 진 후 동쪽에서 玉宇迢迢落月東

    갑자기 만경창파가 붉게붉게 끓더니 波萬頃忽翻紅紅 

    굼틀굼틀 온갖 괴물들은 모두 다 어디가고 蜿蜿百怪皆如畫

    채색 구름 속에서 붉은 해가 솟아 오르네 擎出金輪彩霧中


    이상의 시들은 최공(崔公)이 간성 유수로 있을 때 판각해서 달아 두었던 것으로 언젠가 화재로 그 현판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말았는데, 어느 선비 집에 남아 있던 이 시를 비경이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 베껴 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수몽(鄭守夢)이 유수로 있으면서 비경에게 준 사운시(四韻詩)도 읊기 에 그럴 만하여 역시 베끼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좌중에다 말하기를, 

    “선배들은 별것 아닌 이 시 한 수까지도 그렇게 관심들을 가졌었는데 어찌해서 지금후배들은 그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도 없는지 모르겠어.”

    하였다.

     정수몽의 시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적을 수가 없으니, 일행들에게 다시 물어 보아야겠다. 그 중의 시축에는 요즘 여러 사람들 시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다 그렇고 그런 내용 들이었다.


    15일(정사) 흐림. 가랑비가 싸늘하게 뿌리다가 그쳤다. 기 신(忌辰)이라 좌재(坐齋)하면서 《주역》을 읽었고 부리(府吏)를 시켜 일록(日錄)을 베끼게 하였다. 또 어제 유군을 통해 눌승(訥僧)에게서 얻은 향언지로가(鄕言指路歌)는 퇴계(退溪)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내용을 볼 때 학문에 조예가 없이는 지을 수 없는 내용으로 역시 후일 아이들의 영가(詠歌) 자료로 삼기 위해 베껴 두게 하였다.

    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철(沈轍)이 지나다가 절에 들러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 는데 그는 고 판서(判書) 집(諿)의 손자이고, 사간(司諫) 동구(東龜)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날 또 두 군을 통해 김 장군 응하(金將軍應河)의 애사(哀詞) 두 편을 들었는데, 둘 다 읊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어서 추후 기 록하기 로 하겠다. 말이 난 김에 명(明) 나라 희종(熹宗)이 김응하를 포증(褒贈)한 일에 관해 말을 해야겠기에 내가두 군들에게, 당시 명 나라에서 포증할 때 천자로부터 조서(詔書)가 있었는데 그 조서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보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명문이 아니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건 그렇지 않다. 나도 그 조서를 읽어 보았지만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천자가 자칭 과인(寡人)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김군(金君)을 수양(睢陽)의 장순(張巡),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에게 비유하여 말하기를,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이 죽지 않았더라면 당(唐)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고, 문천상이 죽지 않았더라면 송(宋)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던들 과인의 나라에 신하 없는 폭이 되었을 것이다.’ 했는데, 그 말뜻이 전도되고 사체(事體)를 모르는 정도가 심하였다. 또 문장의 표현 방법까지 서툴고 껄끄러워 마치 고문(古文)을 흉내 내 보고자 하였으나 문장을이루지 못한 것 같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천자 나라에서 외국 신하를 포증하려면 조서를 만들 때도 반드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해야할 것인데, 지어 놓은 글이 그 모양인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만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내 언젠가 또 숭정(崇禎) 연간에 황 감군(黃監軍)이 나왔을 때 그가 읊었다는 시를 보았는데, 내용이 말도 못하게 거칠고 추하고 졸렬한데도 그 자신은 그것마저도 모르는 지라 장계곡(張谿谷)이 그의 작품을 써 놓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듣기에 그 황은 진사 (進士) 출신으로 조정에 오른 이후 우리나라를 왕래할 정도였으니 역시 한때 쟁쟁한 인물이었을 것인데도 그 모양이니 인재가 쇠할 대로 쇠해 세상이 오래 못 가리라는 징조인 것이다. 문장(文章)이라는 것이 비록 별것은 아니로대 한 시대의 성쇠가 거기에도그렇게 반영되는 것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지금을 보면 지금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못 할런지 어떻게 알겠는가.


    16일(무오) 새벽에 일어나 창을 밀치고 일출 광경을 보았다. 그날따라 하늘에는 구름한 점 없고 바다도 활짝 개어 동쪽이 밝기도 전에 서광(瑞光)이 만 길이나 치솟고 있었고 뭇별들은 이미 드문드문해져 함께 빛을 겨룰 만한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늘가에 갑자기 구름 같은 것이 띄엄띄엄 생기면서 가릴 듯이 하더니 막상 붉은 기운이 점점 무르익자 그것들은 녹은 듯이 없어지고 다만 금물결이 만 리나 뻗어 하늘과 물이 서로 밀고 당기 는 것과 같은 것만 보였다. 그것은 화륜(火輪)을 달구느라고 홍로(洪爐)가 너무 뜨거워 바다 전체가 끓고 있는 것과 같기 도 했고, 또 어찌 보면 태양 궤도가 잠겼다 떴다 하면서 뛰어도뛰어도 오르기어려워하는 것 같기 도 했다.

    잠시 후 태양이 불끈 솟자 위아래에서는 서로 받들고 좌우에는 상서로운 구름 자색 서기가 무수히 깔려 있어 마치 그것들을 타고 올라온 것 같기 도 했다. 이에 해는 둥실둥실 떠오르고 그 빛은 아래로 내리쪼여 바다는 바다대로 깊고 넓게만 보이고 하늘은하늘대로 높고 크게만 보였으며, 상하 사방이 똑같이 밝아지고 삼라만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천지간의 일대 장관이었다. 날마다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뜬구름이 가리더니 오늘에야 비로소 장쾌하게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밝음 속에도 어딘가일말의 그 무엇이 살짝 가린 빛을 띠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 겸손해야 하고 밝음을 숨겨야 하는 천지조화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뜻이 아닐런지 나로 서는 감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어 생각하면 모든 물건의 이치가 각기 종류별로 움직이고 형상에 의해 동화되고 있는데 그것을 달리 비유하면 마치 군자가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소인이 나타나 이간질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세상은 항상 드물고 어지러운 세상이 언제나 많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군자가 참으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그리하여 세상이 치평을 향해 치닫게 되면 저 소인이라는 것들은 풀이 죽어 자취를 감추거나 아니면 과거를 청산하고 이쪽으로 심복해 오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쪽에 병통이 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말을 따르고 받들면서 우리 쪽의 쓰임이 될 것이다. 문제는 군자 자신이 자기를 소명하고 순수하고 밝은 덕을 길러 음(陰)을 저 땅 밑에서부터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스스로 높고 밝은 위치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또 세상을 맡아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양웅(揚雄)의 『太玄經』에 이르기를, 

    “태양은 날고 음은 매달려 있으면 만물이 화락하리라.”

    하였다. 그를 해설한 자의 말에 의하면, 태양은 군자를 말하고, 매달려 있다는 것은 녹아 없어짐을 뜻하며, 음은 소인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군자의 기가 성하면 뭇 음은저절로 없어진다는 뜻으로 바로 오늘에 필요한 점괘인 것이다.

    이 날도 기신이어서 재계하면서 앉아 있었다. 밤에 비는 개고 달은 기망(旣望)이어서 바다에 뜨는 달을 또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생각지 않게 17일이 진짜 보름이어서 그런지 해가 서산에 채 지기도 전에 달이 이미 동천에 솟아 있었고, 막 눈을 들고 보려고했을 때는 이미 달이 벌써 구름 끝에 나와 있었다. 저녁이 되어 스님 몇 사람과 함께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나갔더니 중천에 솟은 달이 바야흐로 빛을 발휘하기시작하여 그 빛은 바다 밑까지 비치고 있었으며 만경창파는 은물결로 변하여 위아래가 모두 마치 벽유리(碧琉璃)와도 같았다. 이윽고 바람이 해면을 스치자 파도가 넘실대고 달은 그속을 출몰하니, 마치 삼켰다 뱉았다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 같았고, 또 잠시 후 하늘을보았더니 높고 높은 푸른 하늘에는 외로운 달만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고인이 이른바, ‘사방에 구름 걷히고 은하마저 없는 하늘[纖雲四卷天無河] 일 년 중에오늘 밤 달이 제일 밝네그려[一年明月今宵多]’ 했던 것이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는 비록 일출을 볼 때만큼 장엄하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그 맑고 밝고 깨끗한 자태로 태양을 대신해서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천하의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천지 음양의 이치가 서로 양보라도 하듯이 하나가 차면 하나는 비는 것으로, 옛 분들이 말했던, ‘백옥반(白玉盤)ㆍ요대경(瑤臺鏡)’ 같은 말로는 지금 이 광경을 비교 표현하기에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중 비경 등이, 오늘 밤 달빛은 일 년 중 보기 드문 달빛이라고 한 말에 대해 나도 동감을 하였다. 이미 일출 광경을 보았고 지금 또 중추(中秋)의 밝은 달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이번 걸음은 헛걸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나서 두 군들을 불러내어 같이 구경하다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고 밤기운이 너무 시원해서 요사(寮舍)로 들어가 ≷주역≸ 계사(繫辭)를 종편까지 읽었다. 향을 가져와 피우게 했더니 중이 침향(沈香)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왔기에, 내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들은 이름만 취택하고 실물은 취택하지 않는군. 중국에서 말하는 침향이라는 것은바로 나무 이름인데 남국(南國)에서 나는 나무야. 지금 그대들이 물속의 썩은 나무를가져다가 부처 앞에다 피우면서 그것을 아주 향기로운 것으로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그렇게 이름에 현혹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였다. 다시 흑단(黑檀)을 가져와 피우게 하였다. 흑단은 시속 말로는 노가자(盧柯子) 라고 하는 것으로 그 향기가 매우 맑았다. 또 중향성(衆香城)에서 얻어 왔다는 도로파 (都盧芭)도 피워 보았는데 그것은 향기가 천궁 비슷하면서 역시 정신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내 이어 생각해 보니,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주무숙(周茂叔)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고, 서일상운(瑞日祥雲)은 정백순(程伯淳)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며, 태산교악(泰 山喬岳)과 해활천고(海闊天高)는 또 주회옹(朱晦翁)의 기상을 그린 것인데, 내 사실 이번 걸음에 그러한 것들을 다 직접 보고 정신적으로 느껴 보았고, 일만 겹의 봉래산과동해의 구름 물결 그리고 해돋이 때의 눈부신 광채와 휘영청 밝은 가을 달도 내 모두살펴보고 희롱해 보았다. 게다가 또 하늘까지도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비, 바람, 구름, 먼지 등으로 훼방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가령 안문(鴈門)의 가을비, 죽포 (竹浦)의 거센 파도, 낙산(洛山)의 찬이슬 같은 것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가 앞장서서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작품들로서 누군가가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같았다. 우리가 이번의 이 기회를 단순히 구경만 했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무엇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터득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요산요수 그리고 호연지기라는 것과도 상통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천 년 전의 고인들을 만나 본 것과도 같을 것이다.

    해돋이 구경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를 지어 그 일을 적어 둔다.


    해 뜰 때 바다의 경치를 바라보니 看看海色候扶桑

    떠가는 구름이 하늘을 더럽힐까 두렵구나 常恐浮雲穢太淸

    눈부신 해가 갑자기나타나서 忽覩爀曦懸陰處 

    천 길이나 뻗는 광선 천지사방 다 비추네 千丈毫光六合明


    그리고 낙산중추월(洛山中秋月)을 두고는 노소재(盧蘇齋)의 ‘청간정(淸澗亭)’ 운자로 읊었다.


    바다에 뜬 달은 가을 들어 더 밝고 海月當秋白

    거센 파도는 밤바람에 일어라 鵬濤入夜風

    절 방에 외로이 누워 있으니 禪窓孤臥處

    뭇 생각이 다 사라지는구나 萬慮落眞空


    또 읊었다.


    맑은 것은 한가위의 달빛이 霽色中秋月

    파도소리 큰 바다 바람이어라 波聲大海風

    그 소리 그 빛깔 말고도 須知聲色外

    텅 빈 하늘이 또 있다네 更有寂寥空


    아침에는 심군철(沈君轍)이 왔다가 갔고, 저녁에는 간성 군수 윤세장(尹世章)이 동해신(東海神) 제사의 예차관(預差官)으로 와서 이 절을 지나다가 여러 사람들과 서로 만나고 또 나를 와서 보았는데, 윤(尹)은 바로 윤 상공 해원(尹相公海原)의 증손이요 윤판서 이지(履之)의 손자라고 했다. 대옥 역시 동해신 제사 일로 저녁에 떠나면서 내일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감사(監司)와 도사(都事)가 부(府)에 온다는 말을 듣고 하직을 고하고 떠난 것이다.

    낮에 그 곳의 중 몇 사람과 함께 의상대(義相臺)에 올라 관음굴(觀音窟)을 바라보았더니 작은 집 하나가 파도에 의해 무너져 있었다. 대(臺) 위에 앉아 잠시 물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정(鄭)군과 유(柳)군이 내게로 와 함께 잤다. 그날 사눌(思訥)이라는 중이 영남 태백산에서 와 그 절을 위해 예불(禮佛)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방에서 혼자 거처하며 밤 5경이면 일어나서 불전에 향을 올리는데, 낮에도 자지 않고 밥도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면서 언제나 시간 맞추어 염불을 했다. 내가 데리고 얘기해 보니 그는 선정(禪定)의 설을 듣고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자였다. 내가 묻기를,


    “노선(老禪)께서 마음 공부를 하신 지가 오래인 모양인데 지금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까지 갔습니까?”

    하자,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무리 어지럽고 화사한 성색(聲色)을 듣고 보아도 그것을 안 보았을 때와 똑같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성색에 대한 생각은 그래도 제어하기가 쉽지만 마음에는 유주상(流注想)이라는 것이있어 바로 온갖 잡념이 때없이 왕래하는데, 노선께서는 마음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것들도 다 제거가 되었습니까?”

    하자 그는, 

    “공부 초기에는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었는데 지금은 온전히 없어졌지요.”

    하였다. 공부를 몇 년이나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고, 마음에 잡념 하나 일어나지 않고 혼자 훤한 것을 느낄 때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게 바로 이른바 비치지 않고 있는 거울 같고 파도가 일지 않고 있는 물 같다는 것아닙니까.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불과 같다고 하는데 불은 다른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혹은 풀에 붙거나 혹은 나무에 붙거나 또 혹은 다른 물건에 붙어야지 만약그 물건들이 없다면 그 불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희로애락(喜怒哀 樂)의 감정 발동은 없을지라도 잠깐 사이에 얼핏 스치는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인데그 역시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노선이 말씀하신 이른바, 거울이 비치지 않고 물이 파도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무엇으로 증험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논리라서 이 노승(老僧)으로서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네요.”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시오. 전인들 화두(話頭)에 얽매이지도 말고 문자(文字)를 가지고 참조 고증할 것도 없고 다만 내 마음에 얻어진 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그때 다시 와서 내게 말하시오.”

    했더니, 그 중이 그러겠다고 하고 떠나갔는데, 밤이 되어 간찰 하나를 부쳐왔다. 거기에 이르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이라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염려도 없고 형체도 소리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마음은 있는 것이외다.”

    하고, 또 시가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은 언제나 그 빛이요 明明白月千秋色

    점점이 푸른 산은 만고의 모습이어라 點點靑山萬古容

    그나 내나 유별나게 다른 것이 뭐 있으리 伊我別無奇特事 

    불전에 분향하며 종을 치는 거라네 焚香佛前打鳴鍾


    또 말하였다.


    “마음에 모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물론 있기는 있으나 다만 그것은 순간이고지속하기란 매우 어렵다.”

    내가 이르기를,

    “그대 본 것이 매우 정밀하고 말도 다 좋은 말이오. 나도 시로 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지금 기좌(忌坐)중이어서 내일로 미루어야겠소.”

    했는데, 그 중은 그길로 물러갔다.